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금융시장의 기준 금리를 정하고 은행 시스템 전반을 감독·관리하는 기구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은행 파산으로 촉발된 이번 은행 위기에서 연준의 존재감은 ‘제로’에 가깝다. 1년 사이에 기준금리를 무려 5% 가까이 올려놓고 금리 차이로 발생한 금융 위기에 손을 놓은 셈이다.
연준보다 더 ‘연준처럼’ 움직이는 인물이 있다. 대형은행 최고경영자(CEO)들을 소집해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사태)’으로 파산 직전까지 몰린 중소·지방은행 되살리기 전략을 짜내는 이 인물은 세계 최대 소비·투자은행 JP모건체이스 은행의 제이미 다이먼 CEO다.
다이먼 CEO는 20일(현지시간) 뱅크오브아메리카, 웰스파고, 시티그룹 등 4대 소비은행과 골드막삭스, 모건스탠리, 메릴린치 등 3대 투자은행을 포함한 11개 대형은행 CEO들로 구성된 ‘은행 위기 해결을 위한 토론그룹’을 만들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가 보도했다.
앞서 다이먼은 지난 18일 SVB 파산 직후 뱅크런에 내몰린 퍼스트리퍼블릭은행에 이들 대형은행이 300억 달러를 예치토록 하는 긴급 대책을 실행하기도 했다. 700억 달러의 예금이 일시에 빠져나가 몰락 직전까지 몰렸던 퍼스트리퍼블릭 은행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이 대책이 발표된 이후 재닛 얠런 미국 재무부장관은 다이먼 CEO에 직접 전화를 걸어 이번 사태 해결책을 주도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에 다이먼은 기꺼이 이 임무를 맡았다고 WSJ는 전했다.
다이먼 CEO가 이처럼 각광을 받는 것은 15년전인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무너져가던 미국 금융시스템을 구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2005년부터 JP모건 수장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던 그는 악성 주택담보대출 상품에 엄청난 금액을 투자했다 망해가던 리먼브라더스와 베어스턴스 가운데 베어스턴스를 인수했다. 뉴욕 최대 소비은행이었던 체이스맨해튼은행도 합병,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은행을 만들었다.
다이먼의 이 결정으로 당시의 금융위기는 그나마 어느 정도 해결 가닥을 잡았다는 게 경제·금융 전문가들의 평가다.
JP모건은 미국 금융시장에 위기가 닥치면 언제나 해결사 역할을 자처했던 은행이다. 1907년 전 세계적 대공황으로 미국 대다수 은행이 파산에 직면했을 때 시장 질서를 세우고 금융사들의 대규모 인수·합병을 주도한 것이다.
1913년 설립된 연준은 대공황 위기에 대처한 JP모건을 모델로 만들어진 미국 정부조직이다. 자본시장이 야기하는 엄청난 공황을 막기 위해 기준금리와 통화량을 조절하고 은행 시스템을 감독하는 게 연준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연준의 기능은 기준금리와 통화량 관리로만 제한되고 있다는 게 뉴욕 월가의 평가다. 각종 은행들의 투자 관행을 규제하고 금융시스템을 감독하는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반면 JP모건체이스은행은 여전히 금융시장의 ‘빅 브라더(Big Brother)’ 역할을 도맡고 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다이먼 CEO를 필두로 12개 계열사 CEO들은 소비금융, 장기자산 투자, 단기 주식투자 등 금융시장의 각 영역에서 위기 신호를 감지해 미리 대책을 내놓고 있다.
지난 2월 다이먼 CEO는 연준의 연쇄 기준금리 인상과 관련해 “연준은 인플레이션 통제력을 잃어버렸다”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이처럼 다이먼 CEO와 JP모건이 금융시스템 위기에 전력을 다해 대처하는 이유가 공공선(公共善)을 위한 건 아니다. 금융시장안정 없이는 아무리 큰 대형은행이라도 자본투자 수익을 얻을 수 없다는 ‘대차대조표’ 때문이라는 게 맞는 해석이다.
WSJ는 “다이먼 CEO 주도의 대형은행 은행위기 해소 대책 토론그룹 출범 소식이 나오면서 폭락했던 중소 은행들의 주가가 회복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파산한 시그니처은행의 채권과 예금 등을 인수키로 한 뉴욕 밴코프은행의 주가는 32% 포인트 급등했다.
그러나 문제의 퍼스트리퍼블릭은행은 전날에 이어 이날도 주가가 47.1% 포인트 폭락했다. WSJ는 “대형은행들이 300억 달러의 신규 예치금을 이 은행에 투입했지만, 700억 달러에 이르는 전체 예치금의 상당 부분이 뱅크런으로 빠져나갔고, 아직도 손실 보전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자산이 많다는 사실이 알려진 데 따른 것”이라고 분석했다.
신창호 선임기자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