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곳곳에서 극심한 폭염과 가뭄 등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가 확산하면서 식량위기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경고가 쏟아지고 있다. 이례적 기후 현상으로 농업 생산성이 떨어지면서 미국과 유럽 등 주요지역의 농작물 수확량이 줄어들 위기에 처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악화한 식량위기가 기후변화로 인한 충격까지 받게 됐다.
18일(현지시간) 미국 중부 캔자스주 날씨는 36도까지 올랐다. 이번 주 후반에는 40도까지 치솟을 것으로 전망됐다. 미국의 대표적 밀 재배지역인 이곳은 라니냐로 인한 폭염과 극심한 가뭄을 겪고 있다.
미 공영라디오방송(NPR)은 “평년 같으면 허벅지 높이까지 자랐어야 할 밀이 발목 위로 겨우 올라왔다”며 “몇 달 동안 계속된 가뭄으로 캔자스 서부 밀밭 상당수가 황무지처럼 보인다”고 전했다. 캔자스 농부들은 “가뭄이 닥친 해 중에서 올해보다 나쁜 시기는 없었다”고 토로했다. 주정부는 올해 밀밭 1에이커(ac)당 수확량이 1006㎏ 정도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지난해(1ac당 1415㎏)보다 30% 감소한 수치다.
캔자스는 지난겨울 건조한 날씨로 인한 산불, 올봄에는 우박 피해와 극심한 가뭄 피해를 차례로 겪었다. 현재 캔자스 남서부의 대부분 지역이 ‘극도의 가뭄’과 ‘예외적 가뭄’ 상태다. 미국 가뭄 모니터 데이터상으로도 가장 심각하다. 미 농무부는 캔자스주의 밀 41%가 ‘매우 열악한’ 또는 ‘나쁜’ 상태에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같은 기간(14%)보다 3배 높다. 밀 품질 위원회(WQC)는 캔자스 밀밭 10곳 중 1곳 이상이 올해 수확을 못 하고 버려질 것으로 추정했다. 가뭄이 계속되면서 그 숫자는 앞으로 더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
극심한 가뭄 피해를 본 오클라호마와 콜로라도 지역도 마찬가지다. BBC는 “미국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밀 수출국이지만, 주요 밀 생산 지역인 캔자스주와 오클라호마주에서 봄철 심한 가뭄으로 인해 올해 수확량이 최근 5년 평균보다 7~8% 낮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콜로라도주 북동부의 밀 생산량은 지난해의 절반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미 당국은 주요 지역 생산량이 1ac당 600~800㎏ 정도에 그칠 것으로 추산했다. NPR은 콜로라도 서부와 텍사스 지역에서 25~33%가량의 작물이 버려질 것으로 예상했다.
극한의 폭염을 겪고 있는 유럽에서도 작물 수확 비상이 걸렸다. 유럽연합(EU)은 올해 밀 수확량이 지난해보다 470만t 감소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주요 밀 생산지역인 프랑스 남동부에도 지난 3~5월 극심한 가뭄이 찾아왔고, 6월에는 폭우와 우박이 내렸다.
이탈리아도 지난 5월 이후 평년을 웃도는 고온이 이어지면서 토마토 등 주요 작물 수확량 감소가 현실화하고 있다. 가뭄관측소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포강 수위는 7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는 ‘극한 가뭄’을 겪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탈리아 작물 생산량이 11% 감소할 것으로 예측한 추정치는 과소평가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관계자 발언을 인용해 보도했다. EU 집행위원회가 발표한 7월 가뭄 보고서에 따르면 EU 영토 46%가 주의보, 11%가 경보 수준의 가뭄에 노출돼 있다.
기온이 45를 넘어선 스페인 타바라 지역은 극심한 폭염 속에 덮친 화재로 수확을 앞둔 밀밭이 불에 탔다. 루마니아 티미스의 밀밭에서도 이달 초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다.
반면 러시아는 올해 밀 재배에 적합한 날씨가 이어지면서 수확량이 평년보다 6% 더 높을 것으로 관측됐다. BBC는 “밀 수확 시기가 다가오면서 가격 하락에 대한 기대가 있지만, 생산성은 크게 떨어졌다. 러시아만 유일한 큰 승자가 될 수 있다”며 “이는 러시아가 정치적 영향력을 위해 곡물을 사용할 수 있다는 우려로 이어진다”고 분석했다. 식량안보를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최근 북반구에서 밀 수확이 진행되면서 밀 가격은 소폭 하락했지만, 여전히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8.5% 높다.
기후변화로 인한 작황 악화는 올해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했다. 미 싱크탱크 미국안보프로젝트(ASP)에 따르면 인도는 올봄 강우량이 평년보다 71% 감소했고, 기록적인 폭염을 겪으면서 최대 곡창지대인 펀자브 지역 밀 수확량이 15% 감소했다. 일부 지역은 전년 대비 생산량이 30% 줄었다. 인도는 이 때문에 지난 5월부터 밀수출을 사실상 금지한 상태다.
ASP는 “중국은 자연재해로 3000만ac 농작물이 피해를 보았고, 생산량도 평년의 80% 수준으로 떨어졌다”며 “대두와 옥수수의 주요 생산국인 브라질에서도 가뭄으로 인해 농경지의 28%가 최적 기후 조건을 갖추지 못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케냐, 수단, 소말리아 등 아프리카 지역도 전례 없는 가뭄과 기록적 홍수 등으로 작황이 극도로 나쁘다. 베일리 매슈스 연구원은 “기후 변화가 식량 생산과 식량 안보에 미치는 영향은 광범위하며 더욱 악화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이날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페터스베르크 기후회담에 보낸 영상메시지에서 “나를 가장 불안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전 세계적인 기후위기에 직면했는데도 다자공동체로서 대응을 못 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우리는 공동대응이냐 또는 집단자살이냐,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고 말했다.
안나레나 배어복 독일 외교장관은 “기후위기는 지구상 모든 사람을 위한 최대 안전문제”라면서 “우리에게는 글로벌 탄소배출을 절반으로 줄이기 위한 시간이 8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