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타계한 장쩌민 전 국가주석은 마오쩌둥, 덩샤오핑에 이은 중국의 3세대 지도자다. 1980년대 중반부터 중국 권부의 실세로 등장한 ‘상하이방’의 수장으로 덩샤오핑의 후계자이면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는 정치적으로 긴장 관계에 있었다.
1926년 장쑤성 양저우에서 태어난 장 전 주석은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47년 상하이교통대를 졸업하고 상하이 한 공장의 전기기술 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지린성 창춘에 있는 자동차 회사 등에서 근무하다 62년 상하이 전기과학연구소 부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건 76년 마오쩌둥 사후부터다. 덩샤오핑은 장 전 주석을 전자공업부 부부장에 임명했고 그는 각종 공업 진흥책을 펴면서 당 원로들의 주목을 받았다. 85년 중국 경제의 중심지 상하이시 시장에 임명된 그는 상하이시로 번진 시위를 강경 진압해 중앙정부의 신임을 얻었다.
장 전 주석은 89년 천안문 사태로 실각한 자오쯔양의 뒤를 이어 당 총서기에 선출됐다. 같은 해 덩샤오핑이 맡고 있던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취임한 데 이어 93년 국가주석에 올랐다. 이로써 당 정 군 모두를 장악한 중국의 첫 지도자가 됐다.이때부터 2003년까지 중국 최고 지도자로 재임하며 경제 발전을 지휘했다. 재임 기간 상하이에서 자신을 보좌한 측근들을 중앙에 불러들여 중책을 맡겼고 이들이 상하이방의 모태가 됐다.
장 전 주석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을 충실히 계승해 중국의 경제 도약을 일궜다는 평가를 받는다. 외국 자본을 유치해 도시 인프라를 확충하는 등 상하이를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시켰다. 대외적으로도 ‘도광양회’(빛을 가리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는 뜻) 노선을 이어갔다. 홍콩(97년)과 마카오(99년) 반환,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2008년 베이징 하계올림픽 유치 등이 그의 재임 기간 이뤄졌다. 장 전 주석의 대표 사상인 ‘3개 대표 이론’은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에 이어 2002년 당헌 격인 당장에 삽입됐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배척받는 자본가 계급을 끌어안는 것을 골자로 한다. 95년 중국 최고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고 김영삼 전 대통령 등 정상과 10차례 회담하는 등 양국 관계 기틀을 잡는 데에도 기여했다.
장 전 주석은 은퇴 이후에도 측근들을 중앙정치국과 중앙군사위에 포진시키며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후계자로 발탁한 후진타오를 허수아비로 만들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권력욕이 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2012년 시 주석 집권 이후 정적으로 분류돼 정치적 입지가 좁아졌다. 시 주석의 강력한 반부패 사정에 심복들이 하나둘 몰락했다. 마지막으로 공개석상에 등장한 건 2019년 신중국 건국 70주년 기념식이다. 지난해 7월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식과 지난 10월 당 20차 전국대표대회(당 대회)에 불참해 건강 이상설이 불거졌다.
그러다 20차 당 대회를 며칠 앞두고 시 주석이 장 전 주석에게 보낸 생일 축하 화환 사진이 공개되면서 관심을 모았다. 사진에 찍힌 그는 야위웠지만 건강상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당시 시 주석이 당의 단합을 과시하기 위해 원로들을 당 대회에 초대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지만 장 전 주석은 결국 불참했다. 그리고 시진핑 집권 3기 출범 한 달여만에 세상을 떠났다.
베이징=권지혜 특파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