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대통령이 8일(현지시간) 취임 후 처음 멕시코 국경 도시인 텍사스주 엘패소를 방문했다. 엘패소는 매일 수백~수천 명의 불법 이민자들이 국경을 넘어오는 곳으로, 미국 이민 시스템의 붕괴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지역이다. 공화당이 과반을 장악한 하원 출범으로 정치적 약점인 이민자 문제가 재선 도전을 위협하는 핵심 쟁점으로 떠오를 조짐을 보이자 이에 대응하기 위한 행보로 풀이된다.
로이터통신은 이날 방문에 대해 “대통령이 이민자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주며 국경 순찰대와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며 “재선 도전을 위해 미국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부담되는 문제 중 하나를 다루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현실은 그러나 녹록지 않다. 바이든 대통령을 마중 나온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는 그에게 편지 한 장을 전달했는데, 거기에는 “당신의 국경 방문은 200억 달러가 적고, 2년이나 늦었다”고 적혔다. 바이든 행정부의 이민자 문제 해결 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비판이다. 애벗 주지사는 “당신의 국경 개방 정책은 치명적인 펜타닐과 인신매매로 부자가 된 범죄 카르텔을 대담하게 만들고 있다”며 “텍사스 주민들은 당신의 실패에 대해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바이든 대통령도 이민자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라는 인식에 따라 최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때 불법 이민자를 즉각 추방하도록 허용한 ‘타이틀 42’ 조치를 확대하기로 발표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민주당과 공화당 양측에서 비난을 받고 있다. 진보 인권단체인 이민자정의센터는 바이든 대통령의 조치에 대해 “난민법을 무시하고 국경에서 더 많은 고통을 가할 것”이라며 “이 정책에 분노한다”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트럼프 대통령의 가혹한 이민 정책을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리겠다고 약속했던 대통령에게는 힘이 빠지고 외로운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엘파소에 방문한 바이든 대통령은 자신이 사방에서 포위당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며 “일부 민주당과 인권 운동가들은 그의 새 이민 정책을 ‘인도주의적 망신’이라고 비난한다”고 설명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9~10일 멕시코시티에서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 각각 양자 회담과 3국 정상회담을 한다. 이 자리에서도 이민자 문제가 주요 의제로 오를 전망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최근 멕시코에서 망명을 시도하지 않고 곧바로 미국 국경을 넘는 남미 이민자들을 거부하는 내용의 조치를 발표했다. 이에 대해 멕시코는 “이는 실현 가능하지 않다. 우리 시스템을 압도할 것”이라고 반발하는 상황이다.
현재 이민 문제는 미국에서 가장 양극화된 정치적 논쟁 중 하나로 떠올랐다. 바이든 대통령은 서류 미비로 이민이 받아들여 지지 않은 1100만 명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내용 등을 담은 포괄적 이민 개혁법을 추진하고 있지만, 공화당이 하원을 장악한 만큼 처리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짐 조던 공화당 하원의원은 이날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우리 당은 민주당을 도울 수 있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트럼프 전 대통령의 이민 집행 정책을 채택할 때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트럼프식 이민 정책에는 불법 이민을 막기 위한 무관용 접근 방식이 담겨 있다. 이민자 부모와 자녀를 분리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어 진보 지지층을 기반으로 둔 민주당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치다.
미국은 2022 회계연도(지난해 9월 말 기준)에만 멕시코 국경에서 220만 명의 불법 이민자를 체포했다. 리얼 클리어 폴리틱스가 종합한 바이든 행정부 이민자 대응 문제 여론 평가는 긍정 응답이 36.8%에 그쳤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