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이달 중순 주민투표 절차를 거쳐 우크라이나 남부 전략요충지인 헤르손주와 동부 돈바스 지역을 병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에 수립된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한스크인민공화국(LPR)은 물론, 2월 24일 개전 직후 점령한 헤르손주를 2014년 강제병합한 크림반도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에 예속시키겠다는 것이다.
마이클 카펜터 유럽안보협력기구(OECE) 주재 미국대사는 2일 워싱턴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최근 다수 보고에 따르면 러시아가 DPR, LPR의 병합을 시도할 것으로 본다”면서 “5월 중순엔 러시아 연방 가입을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러시아가 주민투표를 조작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DPR과 LPR은 러시아계 주민이 다수인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으로, 러시아는 이번 전쟁에 앞서 수년간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내전을 겪은 두 지역을 별도의 국가로 승인한 바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 명분을 DPR과 LPR의 독립국 지위를 유지하고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 군사작전’이라고 내세우기도 했다.
카펜터 대사는 러시아의 이 같은 야심에는 남부 헤르손주도 포함된다면서 “역시 조작된 주민투표 절차를 거칠 것”이라고 언급했다.
드네프르강을 끼고 크림반도 바로 위에 위치한 헤르손주는 우크라이나의 수자원 보고이자 전략 요충지다. 전체 수력발전의 90% 이상을 담당하는 지역으로 크림반도로 공급되는 전력도 이곳에서 대부분 생산한다. 30만 인구를 가진 주도 헤르손은 조선산업과 곡물수출항도 가진 남부지역의 핵심도시다.
바로 인근의 멜리토폴은 러시아가 침공 초기 우크라이나인 시장을 강제 연행한 곳으로, 돈바스 지역과 아조우해의 마리우폴, 헤르손을 연결하는 요충지다.
뉴욕타임스는 멜리토폴에서는 우크라이나 정부와 지방 정부의 공무원들이 모두 축출되고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친러 인사들이 행정을 도맡고 있으며, 언론인과 교사 교수 등도 구금되거나 가택연금 상태라고 전했다. 또 각급 학교 교과서가 러시아 교과서로 대체된 것으로 알려졌다. 카펜터 대사는 “그런 조작된 주민투표와 우크라이나 영토를 강제병합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합법으로 간주하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는 이 문제를 긴급사안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는 2014년 크림반도를 강제병합할 때도 귀속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했지만, 찬성률이 무려 96%에 달할 정도로 반민주적인 조작 선거가 행해졌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러시아의 이 같은 움직임이 구체화하자 헤르손주에선 우크라이나 주민들로 이뤄진 반러 레지스탕스 조직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우크라이나 정부 공식방송인 우크라인폼 TV는 최근 “우크라이나계 레지스탕스에 의해 헤르손 시내에서만 100여명의 러시아군이 사살됐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군의 헤르손에 대한 역공세도 크게 강화되고 있다. 러시아군이 장악했던 헤르손 공항은 지금까지 4차례나 우크라이나군의 폭격을 받아 수십대의 헬리콥터와 항공기가 파괴됐으며, 지휘소가 수차례 피격돼 러시아군 장성 등이 사망하기도 했다. 현재 우크라이나군은 헤르손 인근 10여㎞까지 진격한 상황이다.
신창호 선임기자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