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상원에서 총기규제와 관련한 입법 협상이 잠정 타결됐다. 합의안에는 위험인물에 대한 총기 소유 금지를 독려하고, 21세 미만의 총기 구매자에 대한 신원 조회를 확대하는 내용이 담겼다. 총기 소유 금지 대상에 데이트 폭력 가해자도 포함했다. 다만 돌격 소총 규제 등 강경 조치는 빠졌다. 합의안을 바탕으로 입법이 완료되면 29년 만에 처음으로 연방 차원의 총기 규제안이 마련된다.
크리스 머피 등 민주당 상원의원 10명과 존 코닌 등 공화당 상원의원 10명은 12일(현지시간) 성명을 내고 총기 안전 조치를 위한 9가지 초당적 규제 조치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번 합의안에는 ‘레드플래그(red flag)법’을 시행하는 주(州)에 인센티브를 지원하는 내용이 담겼다. 레드 플래그 법은 경찰이나 개인이 위험인물에 대한 총기 소유를 한시적으로 금지해 달라고 연방법원에 요청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현재 워싱턴 DC와 19개 주에서 시행 중이다. 법 시행을 촉진하고 다른 주도 관련 법안을 채택하도록 독려하기 위해 지원금을 주는 것이다.
21세 미만 총기 구매자에 대한 범죄 배경 확인 요건도 강화한다. 18~21세가 총기를 구매할 때 이들의 미성년 범죄 기록과 정신 건강 기록에 관한 확인을 의무화하기로 했다.
초당파 의원들은 배우자가 아닌 데이트 폭력 범죄자에게도 총기 판매를 금지하기로 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남자친구의 허점’(boyfriend loophole)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합의안에는 학교 안전 및 정신 건강 프로그램 강화에 수십억 달러를 지원하는 내용도 담겼다.
초당파 의원들은 공동성명에서 “가족들은 겁에 질려 있다. 그들의 안정감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게 우리의 의무”라며 “미국 어린이를 보호하고, 학교를 안전하게 보호하며, 미국 전역의 폭력 위협을 줄이기 위한 상식적이고 초당적인 제안”이라고 설명했다.
공화당 의원 10명이 합의에 서명하면서 총기 규제 법안의 상원 통과 가능성도 커졌다. 50대 50으로 양분된 상원 의석 상황상 필리버스터를 우회하고 총기 규제를 입법하려면 최소 10명의 공화당 의원 찬성이 필요한 데, 그 숫자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WP는 전미총기협회(NRA)에서 ‘A+’ 등급을 받은 코닌 의원이 공화당 측 협상 대표로 참여하면서 논의가 빠르게 진전했다고 설명했다.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도 “초당적 회담이 좋은 진전을 보여 기쁘게 생각한다”며 합의에 동의했다.
다만 파이낸셜타임스는 “원칙적 합의에 불과하고 아직 입법 내용이 아니어서 앞으로의 협상 과정에 어려움이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 등 민주당과 시민단체는 공격용 소총 및 대용량 탄창 판매 금지, 공격용 소총 구매 연령 21세로 상향 등 내용을 요구해 왔지만, 이번 합의안에는 빠졌다. 그러나 공화당의 강경한 반대로 번번이 입법에 실패해 왔던 기존 협상과 비교하면 의미 있는 진전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는 “총기 폭력에 대처 방법에 대한 정당 간 깊은 분열, 공화당의 반대로 인한 반복적 입법 실패 등을 고려하면 이번 합의는 미흡하지만 주목할 만한 진전”이라고 설명했다.
바이든 대통령도 성명을 통해 “필요한 조치가 모두 이뤄진 건 아니지만 옳은 방향으로 가는 중요한 걸음이다. 수십 년 내 의회를 통과한 가장 중요한 총기 안전 법안이 될 것”이라면서 “초당적 지지가 있는 만큼 상·하원에서 법안 처리를 지체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모든 마을에서의 총기 안전’ ‘우리의 삶을 위한 행진’ 등 총기 규제 옹호 단체도 “총기 폭력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초당파 연합에 박수를 보낸다”며 환영했다.
미 총기폭력기록보관소에 따르면 4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총기난사 사건은 올해에만 264건이 발생했다. 올해 미국에서 발생한 전체 총기 사건 중 17세 이하 어린이·청소년 사망자는 이날까지 739명으로 집계됐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