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11일(현지시간) 스코틀랜드 동북부 밸모럴성을 떠나 영면을 위한 여정에 나섰다. 영국 시민들은 ‘영국의 정체성’을 상징했던 여왕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곳곳에 마중을 나와 애도했다. 과거 영국의 식민 지배를 당했던 국가들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BBC에 따르면 여왕의 운구 행렬은 이날 오전 밸모럴성에서 출발해 약 280㎞ 떨어진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든버러 훌리루드궁으로 이동했다. 행렬엔 차량 약 45대가 동원됐고, 여왕의 딸인 앤 공주와 그녀의 남편이 함께했다.
오토바이 경호를 받은 운구차를 선두로 7대의 장례 차량 행렬이 밸러터, 애버딘, 던디 등 마을을 지났다. 각 지역 주민들과 함께 방문객, 관광객 등 수많은 인파가 도로 양옆으로 늘어서서 꽃을 던지고, 눈물을 흘리며 여왕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영국 정부는 최대한 많은 사람이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도록 운구차를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로 안내했다.
약 6시간 동안의 이동 후 운구차는 여왕의 공식 거처로 쓰였던 홀리루드궁에 도착했다. 운구차가 들어서자 의장대가 경례로 여왕을 맞이했고, 앤 공주는 궁전 입구에 서서 어머니의 관이 내부로 옮겨지는 것을 지켜봤다. 여왕의 시신은 이날 궁전 공식 알현실에 밤새 안치된다. 그동안 앤드루 왕자와 에드워드 왕자 등 왕실 일가가 사적으로 여왕에게 경의를 표할 것으로 전해졌다.
여왕은 12일 홀리루드궁에서 에든버러성 자일스 대성당으로 옮겨진다. 이곳에서 왕실 일가가 참석한 가운데 장례 예배가 거행되고, 예배 후 24시간 동안 대중에 공개된다. 이후 여왕의 관은 13일 찰스 3세 국왕과 커밀라 왕비가 있는 런던 버킹엄궁으로 이동한다. 여왕의 관은 14일 오후 5시부터 19일 오전 6시30분 사이 런던 웨스트민스터 홀에 안치돼 일반에 공개된다. 이후 여왕은 런던 윈저성 내 지하 왕실 납골당에 안치돼 남편 필립공 곁에서 영면에 들어간다.
오는 19일에는 여왕의 국장이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치러지게 되는데,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 이 자리에 참석할 예정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도 장례식에 참석하고, 영연방 국가 및 유럽 정상들도 대거 장례식에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도 장례식 참석 의사를 밝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는다.
전 세계의 애도 물결과는 달리 여왕에 대한 비판 여론도 높아지고 있다. 가디언, 뉴욕타임스 등에 따르면 미국 학자, 전직 외교관들은 영국이 과거 아프리카, 아시아, 카리브해 국가를 식민지로 착취했다며 반성을 촉구했다.
케냐의 변호사 앨리스 무고는 “나는 (여왕을) 애도할 수 없다”며 여왕을 비판했다. 1952년 여왕 즉위 후 영국은 케냐에서 독립 투쟁인 ‘마우마우 봉기’가 벌어지자 잔혹하게 진압한 바 있는데 이를 저격한 것이다. 당시 10만 명 이상의 케냐인이 열악한 환경의 수용소에서 고문, 성폭행 등을 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마야 자사노프 미국 하버드대 역사학 교수도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여왕의 존재(이미지)는 이러한 피비린내 나는 영국 제국주의의 역사를 희석하는 데 도움을 줬다”며 “영연방 수장이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존재는 지난 수십 년간 이어진 격렬한 변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영국 제국주의의 간판이었다”고 지적했다.
박재현 기자 j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