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를 둘러싼 서방과 러시아의 갈등이 격화하고 있다. 러시아는 가스공급을 볼모로 삼아 구매자들이 가스 대금을 루블화로 결제하는 방안을 제도화했다. 미국은 국제 유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사상 최대 규모의 비축유를 방출했다.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러시아 크렘린궁은 푸틴 대통령이 31일(현지시간) 이른바 ‘비우호국’ 구매자들이 1일부터 러시아 가스 구매 대금을 자국 통화인 루블로 결제하도록 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에 비우호적인 서방 국가들은 가스프롬방크에 가스 대금 결제를 위한 계좌를 개설해야 한다”며 “이들이 새로운 결제 조건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현 가스공급 계약은 중단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러시아가 지정한 비우호국에는 한국을 비롯해 미국, 영국, 27개 유럽연합(EU) 회원국 등 48개국이 포함된다.
이 같은 강경한 조치는 루블화 가치를 떠받치려는 의도로 보인다. 현재
러시아 중앙은행이 개입해 루블을 사들이면서 루블화 환율을 유로당 94루블 정도로 유지하고 있지만 이는 일시적인 해결책일 뿐이다. 결국 루블화 가치를 지킬 다른 뚜렷한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외환시장의 루블화 수요를 키우고 서방 제재를 뚫고 외화를 거둬들이려는 시도라는 해석이 가능하다.옥스퍼드 에너지연구소의 잭 샤플리스 박사는 푸틴 대통령의 조치에 대해 “가스프롬방크를 주요 가스 대금 결제 기관으로 지정함으로써 향후 이 은행에 부과될 서방의 제재에 대한 추가적인 방어막을 마련했다”고 분석했다.
러시아산 가스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유럽 국가들은 계약 위반이라며 즉각 반발했다. 로베르트 하벡 독일 부총리 겸 경제장관은 이날 프랑스 재무장관과 공동 기자회견에서 “유럽 국가들에 가스 대금을 루블화로 결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계약 위반으로, 이런 계책은 협박”이라고 비난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앞으로도 유로화나 달러화로 계속 결제하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가스 수입의 40%를 러시아에 의존한 이탈리아의 마리오 드라기 총리도 “계약을 위반하지 않고는 지불 통화를 바꾸기 어렵다”며 루블화 지급 요구를 거부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에게 유가 급등의 책임을 돌리며 사상 최대 규모의 비축유 방출 계획을 밝혔다. 러시아산 원유 금수 조치로 크게 오른 유가를 잡기 위한 조치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대국민 연설을 통해 “푸틴이 전쟁을 선택하며 시장에 공급되는 기름이 줄었다”고 규탄했다. 이어 단기적인 유가 안정을 위해 향후 6개월간 하루 100만 배럴의 비축유를 추가로 방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NYT는 하루 100만 배럴은 미국 내 수요의 약 5%, 전 세계 수요의 1% 규모라고 전했다. 미 정부의 비축유 방출 소식에 국제유가는 급락했다. 이날 뉴욕상업거래소에서 5월물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전장보다 7% 하락한 배럴당 100.28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다우존스마켓데이터에 따르면 이는 3월 16일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10주 연속 치솟던 국내 휘발유 가격의 상승세도 멈췄다. 1일 한국석유공사 유가 정보서비스 오피넷에 따르면 전국 평균 휘발유 가격은 리터(ℓ)당 1996.4원으로 전날보다 2.0원 하락했다. 지난달 15일 ℓ당 2000원을 넘어선 후 보름만인 30일부터 다시 2000원선 아래를 유지하고 있다.
임송수 기자 songst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