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로 교환학생을 간 송모(25세·여)씨. 지난해 9월 인도 수도 뉴델리를 여행 중 신기한 걸 발견했다. 여자는 공짜로 버스를 탈 수 있는 ‘핑크 티켓’이 바로 그것. 그런데 버스 기사분이 분홍색 티켓을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뉴델리에서 돈 내고 버스 타는 여자는 당신이 처음’이라는 듯 묘한 미소마저 보였다.
송씨는 그때를 떠올리며 “자국민뿐만 아니라 외국인 여성에게도 제공되는 줄 몰랐다”고 되뇌었다. “티켓 덕분에 도시의 골목 어귀를 호기롭게 탐방할 수 있어 편하긴 했다”는 설명과 함께 나쁘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다고 말했다.
인도에는 국내에도 알려진 뉴스가 하나 있다. 2012년 12월 16일 뉴델리에서 남자친구와 영화를 본 후 귀가 중이던 여성이 버스 내 6명의 남성에게 성폭행당한 후 신체가 훼손돼 13일 만에 숨진 사건이다. 이후 여성의 안전한 대중교통 이용은 인도 사회에서 주요 화두가 됐다.
뉴델리 주 정부 산하 델리 운송(DTC)은 여성을 위한 무임승차권을 제공하면 여성의 대중교통 이용률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 바라봤다. 이용률이 높다면 자연스레 안전해질 것이라는 예상도 곁들였다. 그리고 2019년 10월부터 지금의 핑크 티켓을 발행하고 있다.
하지만 핑크 티켓 정책을 반기지 않는 이들도 있다. 남녀를 구분하는 발상 자체가 여성 차별적이라며 “안전한 도시를 만들어서 달랬지 누가 공짜 차표를 달랬느냐”는 비판을 SNS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 “여성도 동등하게 일을 하고 돈을 번다. 노약자도, 장애인도 아닌 우리를 왜 무시하느냐”며 여성 자체가 약자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경고도 있다. 특히 BBC 등 서구 언론에선 "인도에서의 성폭력은 남성성과 힘을 과시하는 도구"라며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문화적 전통·인식이 진짜 문제"라는 분석도 있다.
티켓
인도 뉴델리의 자와할랄 네루대학교(Jawaharlal Nehru University)에서 사회학과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윤보람씨에게 직접 핑크 티켓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우리나라 언론 보도를 살펴봐도 정책이 여성 안전을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고 전하고 있어요. 물론 이 지적은 타당하지만, 한가지 간과해선 안 될 것은 이 정책의 시행으로 여성의 자유로운 이동권이 보장됐을 뿐 아니라, 경제 활동 참여도 촉진됐다는 점입니다”
“지금 인도에서는 여성의 바깥출입을 통제하기 위한 것으로 철저히 가부장적인 배경이 깔려 있어요. 정책 시행 후 버스 이용객 중 최소 76%가 핑크 티켓을 사용했다는 건 정책 시행 후 버스 이용이 실질적으로 더 안전해졌다고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로운 이동권이 보장됐기 때문일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2030세대에게 익숙한 명대사다. 노인 무임승차를 두고 세대 간 갈등을 빚어낸 대한민국의 모습처럼 인도는 여성 무임승차를 두고 남녀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쉽게 드러나지 않는 사회·문화적 맥락이 있다. 마치 정말 문제를 일으키는 주체는 따로 숨어 ‘서로 죽여라’며 구경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인도에서 그 주체는 바로 신분제가 빚어내는 차별이다. 윤보람씨의 설명이다.
“신분제 관련 성범죄 피의자는 주로 상층 카스트 남성들입니다. ‘달리트(천민 계급)의 버릇을 고쳐 놓겠다’는 명목으로 범죄를 저질러요. 인도 국가범죄기록국(National Crime Record Bureau)에 의하면 2019년 하루 평균 10명의 달리트 여성이 성폭행당합니다. 하층 카스트 여성들이 성폭력에 훨씬 더 노출돼 있기에 성폭력과 카스트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설명할 수 있어요”
하층 카스트들은 다른 교통수단과 비교해 저렴한 버스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대중교통이 저렴해지자 늘어난 여성들의 경제 활동. 이런 상황을 반기지 않을 이는 누구일까.
핑크 티켓은 더이상 여성만을 위한 정책이 아니다. 뉴델리 정부는 2년간의 핑크 티켓 성과를 입증한 후 지난해 5월부터 노동자를 위한 버스 무임승차권 발급 정책을 발표했다. 건설 노동자뿐만 아니라 전기 기사, 목수, 페인트공, 배관공 등 120만 노동자가 혜택을 받는다. 어쩌면, 핑크 티켓은 성별이 아닌 인간으로서 모두가 평등한 나라가 되기 위한 첫 발자국이 아닐까. 앞으로 차별받지 않는 차별을 향한 인도의 행보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