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법무부와 연방 검찰에겐 불문율이 하나 있다. 전국 단위 선거 시작 60일 전부터는 정치 관련 수사를 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칫 수사가 영향을 미쳐 선거 결과가 뒤바뀌는 일이 벌어질까 우려하기 때문이다.
미국 법무부 장관은 각 주와 대도시에 설치된 연방검찰의 수사를 직접 진두지휘한다. 장관과 검찰총장이 분리된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은 법무부 장관이 검찰총장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 바이든 행정부의 1대 법무부 장관인 메릭 갈랜드 장관에게 엄청난 딜레마가 발생했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국가기밀 탈취사건이다. 트럼프가 재직 중 자신에게 올라온 대량의 국가기밀 문서를 ‘자신만의 왕국’ 플로리다주 마라라고 리조트로 빼돌렸다가 검찰과 연방수사국(FBI)의 압수수색 과정에서 발각된 사건 말이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갈랜드 법무부 장관이 각주 연방검찰청 검사장들과 최근 회의를 갖고 이 문제를 심도 깊게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갈랜드 장관은 이들 외에도 미국 민주당 고위 관계자, 법률자문역 등과도 이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그는 도널드 전 대통령 관련 사건을 담당하는 뉴욕주, 버니지아주, 워싱턴DC, 플로리다주 연방검찰청에 “반드시 정치인 관련 사건은 처리 과정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하고 수사 진행 상황에 대한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역대 미국 선거에서 연방검찰이 ‘60일 전 정치 관련 수사’ 불문율을 지키지 않았다가 엄청난 역풍을 맞았던 일은 여러 차례 있었다. 가장 최근은 트럼프 전 대통령 대 조 바이든 현 대통령이 맞붙었던 2020년 10월이었다. 윌리엄 바 당시 법무부 장관은 지지부진하던 바이든 대통령 차남 헌터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불법로비 사건에 대한 수사를 적극 재개했다. 헌터 바이든이 아버지의 정치경력을 이용해 우크라이나 정부와 유착해 미국 이익에 반하는 활동을 했다는 의혹을 수사를 통해 확인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검찰의 수사는 무리한 수사과정에 대한 일선 검사들의 저항에 부딪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고, 되레 민주당 지지층의 결집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트럼프는 그해 대선에서 박빙의 차이로 바이든 대통령에 패배했고, 선거결과에 불복하는 초유의 사태 끝에 사퇴했다.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과 트럼프 전 대통령이 맞붙었던 2016년 대선은 ‘60일 전 정치수사 금지’ 불문율을 깬 연방검찰이 선거 결과를 직접 뒤바꿔놓은 것으로 악명을 떨쳤다. 당시 제임스 코미 FBI 국장이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 재직했던 클린턴의 이메일에 국가기밀이 담겨있었으며 이를 사적인 용도로 활용했다는 의혹을 대대적으로 수사한 것이다.
클린턴이 업무과정에서 이메일로 자신의 비서와 소통한 일 이외에 국가기밀이 다른 용도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났지만 대선 결과는 이미 바뀐 뒤였다. 여론조사 과정에서 트럼프를 크게 앞지르던 클린턴은 FBI와 연방 검찰의 수사 사실이 언론에 노출된 뒤 트럼프에 점점 밀리기 시작했고, 끝내 대선에서 패배했다.
신문은 “연방검찰이 중간선거에 나서는 공화당 후보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엄청난 위력을 행사하는 트럼프 전 대통령을 건드릴 경우 어떤 반작용이 생길지 고심에 빠져있다”고 전했다. 2016년처럼 수사 당사자가 선거에서 결정적으로 패퇴할지, 아니면 2020년처럼 거꾸로 선거 승리자가 될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란 해석이다.
NYT는 “트럼프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지금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지금, 갈랜드 법무부 장관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관심사”라면서 “수사를 미루는 게 타당해 보이지만, 그럴 경우 선거 이후 트럼프 관련 수사가 더욱 미궁으로 빠질 수도 있다”고 전했다.
신창호 선임기자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