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금된 20대 여성의 의문사에 반발하면서 시작된 이란의 반정부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개혁·개방 실패와 정치·경제적 위기를 느낀 이란 국민이 세예드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 체제의 이란 정권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는 24일(현지시간) “이란 내 80여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다”고 보도했다. 특히 이란의 공화국 체제에서 처음으로 테헤란 내 고층 아파트에 거주하는 부유층과 상인·노동계, 쿠르드족과 투르크족, 그 밖의 소수민족이 전방위적으로 시위에 참여하는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진단했다.
테헤란을 비롯해 여러 도시에서 보안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거나 경찰이 주택에 최루탄을 쏘고 창문을 향해 사격하는 장면이 SNS를 타고 전해지고 있다. 시위대는 이런 군·경에 저항해 군용 차량에 불을 지르고, 여성의 복장을 검사하는 ‘풍속 단속 경찰’의 본부를 폭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란 국영 TV는 지난 25일 시위 발발 이후 최소 35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시위는 지난 17일 시작됐다. 22세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금돼 경찰 조사를 받던 지난 16일 숨지면서 시민들이 봉기했다. 이 시위가 반정부 구호를 끌어냈고, 군·경의 탄압과 맞물려 유혈사태로 번졌다.
이란 정부는 2009년 부정선거 의혹을 계기로 촉발된 시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민중 저항을 받자 군·경을 투입해 강경 진압하고 있다. 당시는 물론 2017년 경제정책 실패, 2019년 유가 인상을 계기로도 전국적 시위에 직면했을 때 보안군을 투입해 진입했다.
이란 정보당국은 자국 내 모든 휴대폰 사용자에게 ‘이란의 주적이 조직한 시위에 참여할 경우 샤리아(이슬람 율법)에 따라 처벌될 것’이라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발송했다. 아마니 사망 사건을 보도한 일간지 기자를 포함해 17명의 언론인이 체포됐다.
라이시 대통령은 최근 유엔총회에 참석하고 귀국한 뒤 “정부는 어떤 상황에서도 국가와 대중의 안전이 위협을 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시위대에 경고했다. 라이시 대통령의 이런 강경한 태도와 무력 진압이 시위의 규모를 키우고 있다.
국제위기그룹의 이란 책임자 알리 바에즈는 각계각층에서 결집해 전국적으로 번진 시위 규모에 대해 “젊은이들이 위험을 감수해도 잃을 것이 없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이라며 “시민들은 지금의 체제에서 개혁할 수 있다고 더는 믿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