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점령 지역에 대한 병합 찬반 주민투표가 지역별 최고 99%가 넘는 압도적 찬성률로 가결됐다. 러시아는 다음 달 초 점령 지역에 대한 합병을 공식 선언할 예정이다. 러시아가 ‘영토 방어’를 명분 삼아 전쟁을 더 격랑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 점령지인 도네츠크, 루한스크, 자포리자, 헤르손주의 각 지역 선관위는 27일(현지시간) 지난 23일부터 치러진 병합 찬반 주민투표 결과를 발표했다. 찬성률은 도네츠크 99.23%, 루한스크 98.42%, 자포리자 93.11%, 헤르손 87.05%로 나타났다. 투표가 치러진 지역은 우크라이나 전체 영토의 15% 정도로, 포르투갈 전체와 맞먹는 약 9만㎢ 면적이다.
이번 투표는 러시아군이 현지를 점령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실상 주민들을 통제하며 이뤄진 선거라 ‘가짜 투표’ 논란이 일었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주민투표를 근거로 다음 달 초 러시아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4개 지역의 합병을 공식 선언할 예정이다. 러시아는 2014년 크림반도 병합 때도 투표부터 최종 선언까지 모든 절차를 일주일 안에 완료했다.
러시아의 병합 선언은 전쟁의 성격을 침공이 아닌 방어로 둔갑해 점령 지역을 완전한 자신들의 영토로 만드는 시간을 벌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당초 전쟁의 명분이던 ‘우크라이나에 있는 러시아계 주민의 해방’에서 ‘러시아 영토 지역의 치안과 방어’로 전쟁의 성격이 바뀔 경우 러시아는 전쟁에서 더욱 공세적 태도를 취할 수 있다.
핵무기 사용 명분도 생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21일 대국민 연설에서 “러시아의 영토 통합성이 위협을 받으면 모든 수단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푸틴의 병합 조치는 러시아 국민에게 전쟁을 정당화할, 체면을 세울 수 있는 뭔가를 주지 않는다면 점령 지역을 정말 파괴할 것임을 시사한다”며 “체첸 공화국의 수도 그로즈니와 시리아 북부 도시 알레포를 기억하란 뜻”이라고 분석했다. 푸틴 대통령은 1999년 총리 시절 체첸 전쟁에서 반군 소탕을 이유로 그로즈니 도심에 대한 무차별 공격으로 민간인 수천명을 사망하게 한 바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동맹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점령지 병합 투표 강행에 강력히 반발하며 공동대응에 나서기로 했다.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유엔 주재 미국대사는 27일 알바니아와 공동으로 러시아의 병합 투표를 규탄하고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내용의 결의안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키로 했다고 밝혔다. 토머스-그린필드 대사는 “미국은 러시아가 점령하려고 한 어떠한 영토도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만약 이런 투표 결과가 받아들여지면 닫지 못할 판도라 상자가 열리게 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로이터통신은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11억 달러(약 1조5700억 원) 규모의 추가 군사 지원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익명의 소식통은 이번 지원에 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HIMARS·하이마스) 발사대 시스템과 여러 종류의 드론 시스템, 레이더 시스템, 군수품과 예비품, 훈련·기술 지원이 포함될 것이라고 전했다.
대러 제재도 추가된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이날 “우리는 러시아가 병합을 진행하는 데 대해 추가로 심각하고 신속한 제재를 부과할 것이라고 밝혀 왔다. 우리는 (제재)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유럽도 별도 제재에 나선다. 제임스 클리버리 영국 외무장관은 이번 투표에 협력한 지역 고위인사들과 투표 홍보 대행사, 보안 문서 관리 회사들을 제재한다고 발표했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은 “러시아가 실시한 사기 국민투표는 정당성이 없고,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고 밝혔다.
박재현 기자,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j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