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 거주 중인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규탄하며 우크라이나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전쟁이 발발한 지 1년이 지났음에도 종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우크라이나에 연대 의사를 표시하는 집단 시위가 이어지는 등 조직적인 집단 움직임이 본격화하는 분위기다.
뉴욕타임스(NYT)는 26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1년을 맞아 전 세계 45개국 120여개 도시에서 러시아인들의 동시다발적 시위가 벌어졌다고 보도했다. 수천명의 군중이 모인 대규모 시위는 아니었지만, 지난 23일부터 이날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스페인 바르셀로나·독일 베를린·프랑스 파리·영국 런던에서 열린 반전 집회에 수백명이 모였다. 개전 이래 러시아 망명자들이 정착한 주요 도시들이다.
참가자들은 시위의 주된 목적으로 두 가지를 꼽았다. 첫 번째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반대하는 러시아인들이 많다는 걸 알리기 위함이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푸틴의 전쟁’으로 규정하며 “모든 러시아인이 푸틴의 전쟁에 지지를 표하는 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또 러시아군의 잔혹한 공격에 항전 중인 우크라이나 국민을 향해 지지와 연대 의사를 표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에서 열린 시위에 아내와 함께 참석한 구소련 국가 몰도바 출신의 로만 쇼어(34)는 “해외에 거주하는 대부분 러시아인은 전쟁에 반대한다고 생각한다”고 NYT에 말했다. 그는 “폭력과 제국주의에 지지하지 않는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함께 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며 시위에 나서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참가자들은 ‘슬로보 우크라이나(우크라이나에 승리를)’ ‘러시아에 자유를’ 등의 구호를 우크라이나 국기나 러시아 야당 깃발에 적어 내걸었다. 파괴된 우크라이나 도시의 이름을 나열한 포스터를 걸기도 했다.
러시아 석유재벌 출신으로 대표적인 반푸틴 인사로 꼽히는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도 지난 23일 런던 주재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진행된 시위에 참석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는 푸틴과 이 공격적인 전쟁에 반대한다”며 “이 전쟁의 끝은 푸틴 정권의 종말이 되리란 것을 잘 알고 있다. 러시아는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외쳤다.
반전 시위는 러시아 안에서도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국외 시위처럼 적극적인 의사 표현은 하지 못했지만 우크라이나의 역사적 인물을 기리는 기념비에 꽃이나 인형을 놓는 것으로 목소리를 대신했다.
일부는 현수막에 전쟁에 반대한다는 직접적인 의견을 적어 내걸기도 했다. 러시아 중부 도시 페름에서는 누군가 전쟁 지지의 공식 표식인 알파벳 ‘Z’자를 사용해 ‘해탈의 해’라고 적힌 흑백 현수막을 게시했다. 모스크바 북동쪽 이바노보주에 걸린 현수막에는 ‘평화를 위한 피바다’라며 크렘린궁을 조롱하는 문구가 적혀 이목을 끌었다. 이는 러시아 독립 언론 ‘메두자’를 통해 소개됐다.
러시아의 정치 분석가이자 전 크렘린 연설비서관인 압바스 갈랴모프는 반전 시위가 많아질수록 국내 여론도 평화론으로 돌아설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그는 “푸틴은 러시아인들이 모두 자신을 지지한다는 걸 확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도 그의 ‘게임’을 방해할 것”이라고 NYT에 말했다.
그러면서 “만약 시위가 늘어난다면 전쟁에 중립적 의견을 내놓고 있는 러시아의 평가 유보자 대다수가 야당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송태화 기자 alv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