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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기업 돈줄 SVB 파산… 금융위기 이후 최대 규모


총자산 2000억 달러가 넘는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했다. 미국에서 파산한 은행 가운데 규모가 두 번째로 크다. SVB는 미국 스타트업 회사들에 대한 유동성 공급을 책임져온 만큼 고객 회사들의 줄도산 우려가 제기된다. 이미 영국 등 SVB 해외 지점 영업중단 사태가 발생하는 등 파장이 전 세계로 확산할 조짐도 보이고 있다.

미 캘리포니아주 금융보호혁신국은 지난 10일(현지시간) 불충분한 유동성과 지급불능을 이유로 SVB를 폐쇄하고,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파산 관재인으로 임명했다. FDIC는 곧 신규법인 ‘샌타클래라 예금보험국립은행’(DINB)을 세워 SVB의 기존 예금을 모두 이전하고, SVB 보유 자산 매각을 추진하기로 했다. SVB의 파산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워싱턴뮤추얼 붕괴 이후 최대 규모다.

FDIC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SVB의 총자산은 2021년 말(1160억 달러)보다 930억 달러 증가한 2090억 달러다. 1년 만에 자산이 두 배 가까이 증가하는 초고속 성장을 이룩하며 미국에서 16번째로 큰 대출 기관이 됐다. 벤처캐피털의 자금을 지원받는 미 기술업체, 보건업체 44%가량이 SVB의 자금을 활용한다.


몰락의 원인은 의외로 단순했다. SVB는 언제든 상환을 요구할 수 있는 고객 예금을 국채 등 장기 자산에 투자하며 성장했다. 저금리 시기 수익률을 높이려고 장기 자산에만 ‘몰방’식 투자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연준의 긴축으로 금리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신생기업들의 유동성 위기가 불거졌다. 차입비용이 커진 신생기업들은 돈줄이 마르기 시작했고, 성장 타격도 입었다. SVB로 들어오는 고객 예금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거꾸로 초저금리 시대 SVB 은행이 사들인 장기채권 가치는 뛰어올랐다. SVB가 투자한 210억 달러 규모 채권 수익률은 평균 1.79%에 불과하지만, 현재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3.9%를 넘어섰다. 미실현 손실이 산더미처럼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금 압박을 느낀 스타트업 회사들이 예금 인출에 나섰고, 이를 위해 SVB는 보유 채권을 헐값에 팔 수밖에 없었다. 미실현 손실이 실제 손실로 이어진 것이다. SVB는 지난 8일 예금 지급을 위해 미 국채로 구성된 매도가능증권(AFS·만기 전 매도 의도로 매수한 채권과 주식) 상당량을 매각, 18억 달러 규모의 손실을 봤다고 발표했다. 또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22억5000만 달러 신주 발행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 발표는 다시 고객 불안감을 자극해 뱅크런을 가속했다. SVB의 예금 95%가량은 FDIC 보증이 되지 않아서 뱅크런 사태에 구조적으로 취약한 상태였다. 결국 금융당국은 SVB 발표 44시간 만에 파산 절차에 돌입했다. SVB의 그레그 베커 회장은 손실 공시 8일 전인 지난달 27일 모회사인 SVB파이낸셜 주식 1만2451주(약 360만 달러)를 매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 사태가 재무구조가 열악한 스타트업 업체들의 줄도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초기 단계 스타트업인 리파이버드의 CEO인 사리카 바자즈는 “3년간 SVB 고객이었고, 회사 자금 대부분을 보관했다”며 “돈을 빼려 했지만 실패했다”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SVB와 거래했던 업체들은 은행 파산으로 수천 명의 정리해고가 발생하고, 많은 근로자가 다음 급여를 받지 못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전문가들은 스타트업체들의 불안 확산으로 SVB와 유사한 은행에서도 뱅크런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지난주 암호화폐 업계에서 가장 큰 은행 중 하나인 실버게이트 캐피털이 자발적 청산을 발표했다. FDIC에 따르면 미국 은행 업계 전체에서 지난해 말 기준 유가증권 미실현 손실은 6200억 달러에 달한다.

여파는 다른 나라에도 번지기 시작했다. 블룸버그는 “영국 SVB도 파산 절차를 밟을 예정”이라며 “거래를 중단하고 신규 거래를 받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영국의 180개 테크 기업 대표는 “많은 기업이 하룻밤 사이 비자발적 청산에 처하게 됐다. 이는 기업 생태계를 20년 후퇴시킬 수 있다”며 제러미 헌트 재무장관에게 개입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SVB 캐나다 지점 대출 규모는 4억3500만 캐나다달러로 전년(2억1200만 달러) 보다 두 배 늘어났다. 토론토 광고 기술 개발 업체인 ‘어큐티 애즈’는 보유 현금의 90%에 달하는 5500만 달러를 SVB에 예치해뒀다

블룸버그는 “SVB는 캐나다, 중국, 덴마크, 독일, 인도, 이스라엘, 스웨덴에도 지점을 두고 있었다”며 “(벤처) 창업자들은 전 세계 스타트업을 전멸시킬 수 있다고 경고한다”고 보도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대형은행을 비롯한 금융권 전반으로 확산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봤다. SVB는 기술 분야 스타트업에 특화된 형태의 은행이어서 다른 금융 기관 구조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재무부는 “재닛 옐런 재무장관이 연준 등 관계 기관과 만나 SVB 사태 대책을 논의했다”며 “은행 시스템은 여전히 유연하고 당국은 이 같은 일에 대응할 효과적 조치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서실리아 라우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도 브리핑에서 “우리 은행 시스템은 10여 년 전과 근본적으로 다른 상태”라며 “금융위기 이후 도입한 스트레스 테스트 등 개혁 조치 덕에 금융 당국은 은행 시스템의 회복력을 강화할 도구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날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통화하고 SVB 파산 관련 대책을 논의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