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벨라루스에 전술 핵무기를 배치하기로 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동맹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맞대응 성격으로 전술 핵무기 배치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실행에 옮기면 1990년대 중반 이후 30여년 만에 국외에 전술핵무기를 배치하는 것이 된다.
푸틴 대통령은 25일(현지시간) 러시아 국영 TV와 인터뷰에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과 이 문제(전술 핵무기 배치)를 논의했고 의견이 일치했다”고 밝혔다고 로이터통신 등이 보도했다. 푸틴 대통령은 구체적인 시기는 언급하지 않고 “모든 합의는 가까운 장래에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특히 “특별한 일이 아니다. 미국은 수십 년 동안 그렇게 해왔다. 그들은 오랫동안 동맹국의 영토에 전술 핵무기를 배치해 왔다”며 “핵 비확산 합의에 관한 국제적인 의무를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 미국과 똑같이 하기로 합의했다”고 강조했다. 또 “핵무기를 이전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처럼 무기를 배치하는 것”이라며 “무기의 통제권은 러시아가 가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조치가 미국 등 서방의 조치에 대응하는 성격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영국이 우크라이나에 열화우라늄탄을 제공할 것이라는 국방부 부장관의 성명이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영국이 제공하려는 열화우라늄탄에 핵물질이 들어 있다고 주장하며 “상응하는 대응을 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푸틴 대통령은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 이스칸데르 미사일 다수와 항공기 10대를 벨라루스에 이미 주둔시켰고, 오는 7월 1일까지 전술 핵무기 저장고를 완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사일 운용 등을 위한 벨라루스군 훈련도 다음 달 3일부터 시작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벨라루스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인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가 내린 가장 중요한 무기 조치”라고 설명했다.
빈 군축·비확산센터(VCDNP)의 니콜라이 소콜 선임연구원은 “러시아가 자국 영토 밖에 핵무기를 두지 않았다는 점을 자랑으로 여겨왔던 것에서 매우 커다란 변화”라고 설명했다.
미국과학자연맹(FAS)의 한스 크리스텐슨 국장은 “나토를 위협하려는 푸틴의 게임”이라며 “러시아 내에 이런 핵무기가 매우 많이 있다는 점에 비춰보면 벨라루스 배치에 딱히 군사적 효용이 없다”고 분석했다.
미국은 푸틴 대통령 발언에 대한 확대해석을 경계하며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에드리엇 왓슨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은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지난 1년간 이번 합의에 대해 논의해 왔다”며 “우리는 전략적 핵 태세를 조정할 어떤 이유도, 러시아가 핵무기 사용을 준비하고 있다는 어떤 징후도 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강하게 비난했다. 올렉시 다닐로우 우크라이나 국가안보국방위원회 서기는 “크렘린이 벨라루스를 ‘핵 인질’로 삼은 것”이라며 “벨라루스의 내적 불안정으로 향하는 조치”라고 비판했다.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고문도 “푸틴이 현재 국면에서 할 수 있는 게 전술 무기로 겁을 주는 것뿐임을 시인한 셈”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