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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미국사회 구조적 모순 30년주기 흑인 폭동”

유의영 전 교수가 LA 폭동 당시 본보와 펼친 한인사회 긴급구호 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상혁 기자]유의영 교수는 LA 폭동 당시 한국일보가 한인사회 각계 인사들로 구성한 코리아타운 비상구호대책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긴급 구호활동을 진두지휘했고 피해자 돕기 성금을 가장 많이 모아 투명하게 집행했다. 당시 유의영(왼쪽부터) 교수와 장재민 본보 사장이 피해자들에게 성금을 전달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LA 폭동 30주년을 맞아 미국 속 한인 연구에만 40년 이상을 바쳐온 미주 한인 이민사 연구의 산증인 유의영(85) 전 칼스테이트 LA 사회학 교수를 만났다. 한민족 디아스포라 연구의 대표적인 1세대 학자인 그는 “다민족 사회인 미국에서 일어난 흑인 폭동의 이유를 분석하고 이를 막으려 노력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과제”라고 운을 뗐다. 유 전 교수는 4.29 발발 후 30년을 되돌아보며 미국 내 흑인 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경제적 모순이 30년을 주기로 폭발한다는 30년 주기설을 제기했다. 다음은 유의영 전 교수와의 인터뷰를 문답식으로 정리한 것이다.-4.29 발발 30주년을 맞았다.▲4.29는 흑인의 역사를 잘 알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미국 사회에 여전히 실재하는 인종 간의 격차, 인종주의가 두루 작용했다. LA 폭동에서 비율적으로 한인들의 피해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타인종들의 피해도 많았다. 당시 한인 이민자들이 흑인 지역에서 비즈니스를 많이 했다. 이민 역사가 짧다 보니 흑인 문화나 미국 사회에 익숙지 못했고 폭동이 발발하자 옆에 있던 한인들의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4.29가 한인과 흑인간의 인종 갈등에서 비롯됐다는 시각은 잘못된 것이다.-당시 커뮤니티 비상구호대책위원장으로 활동하셨는데.▲폭동 직후 미주 한국일보가 발족한 코리아타운 비상구호대책위원회의 위원장으로 기금 모금을 전개했었다. 미국 사회내 소수계 신문의 역할에 가장 충실한 신문이 미주 한국일보였고 한인사회가 위험에 처했을 때 빛이 났다. 당시 한국일보가 모금한 액수가 가장 많았다. 모금된 기금은 투명성 있는 관리를 통해 폭동 피해자들에게 500달러씩 지급됐다. 고 임동선 목사를 주축으로 동양선교교회에 센터를 주차장에 한인구호비상대책센터를 만들어 구호품을 나눠줬고, 한인사회 여러 단체들과 인종 화합을 위한 많은 활동을 벌였다.-4.29의 근본적 원인은 어디에 있었다고 보나.▲미국 내 흑인 폭동은 30년을 주기로 발생해왔다. 이는 인종적 갈등보다는 미국이 안고 있는 사회, 경제 구조적 모순에 기인한다. 1965년 LA 사우스 센트럴 지역 왓츠에서 경찰 과잉 단속으로 흑인 폭동이 일어났고, 1992년 로드니 킹 사건을 기폭제 삼아 폭발한 4·29 LA 폭동, 그리고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이후 미국 전역에서 확산된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M) 운동까지 30년 마다 발생한 흑인 폭동들의 원인이 흑인들이 처한 구조적 모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흑인들은 피해 의식이 있고 아직까지 높은 실업률, 생활고를 겪으며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생활하는 이들이 많다. 이같은 불균형과 불만이 몇 가지 사건과 겹치면 폭발하고 만다. 4·29 LA폭동 역시 로드니 킹 사건을 기폭제 삼아 폭발한 것이었다. 한인들은 당시 LA의 흑인 거주지와 베벌리힐스 백인 부유촌의 ‘중간적 소수인’이었고, 이러한 경제구조의 특수성 때문에 흑인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됐다.-4.29가 한인사회에 미친 영향은.▲폭동 이후 흑인 지역을 탈피해 타 지역 비즈니스로 눈을 돌리는 업주들이 생겨났고 인종과의 관계 개선, 주인의식, 정치력 신장의 필요성 등을 배워가기 시작했다. 폭동 직후 피해자를 돕는 성금이 답지했고 평화대행진에 수만명의 한인들이 참여하는 단합된 모습도 보였다.-4.29 30주년을 맞아 현재 미주 한인사회의 현주소는.▲한인 정치력 신장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지금은 캘리포니아주를 대표하는 연방하원의원, LA 시의원 등 한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정치인들을 다수 배출할 만큼 한인사회가 크게 성장했다. 미국에서 교육받은 2, 3세 이후의 세대들은 미국 사회를 완벽히 이해하고 언어장벽도 없어 앞으로 20~30년 이내에 주류 정치계와 공직사회에 널리 포진하게 될 것이다.-한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한국인은 ‘정’이 많은 인종이다. 친절하게 먼저 대화를 나누는 풍조를 만들면서 소통이 원활한 다인종 사회를 살아가야 한다.유의영 교수는유의영 교수는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1963년 미국 유학을 왔다. 펜실베니아대 사회학 박사를 마치고 1968년 칼스테이트 LA 교수로 임용됐고, 같은 해 칼스테이트 LA에 한국학 연구소를 설립, 초대 소장을 지냈다.60년 전 미국 땅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대학교수 생활을 하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미주 한인 관련 인구 조사, 커뮤니티 연구 프로젝트 등에 몰두했다. 또 미주 한인사회의 현황을 말해주는 역사적 자료 수집에 혼신을 다했다. 사회학과 인구통계학을 전공한 만큼 대학 교수로 부임한 그에게 리서치 우선순위 1위는 미주 한인 생활상이었다.한인 경제 규모와 가정문제, 청소년 문제 등 한인사회의 주요 이슈를 숫자로 잡아내 현황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성과였다. 또, 1970년대 초 그의 첫 한인연구 조사의 결실로 ‘미국 속 한인들’이란 책을 출간했다. 변변한 한인 자료가 거의 전무하던 시절, 한인들의 현 주소를 찾아내 다양한 분야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값진 노력의 결과물이었다.그리고 1992년에는 ‘미국을 사는 한인들: 교포 학자의 눈에 비친 한인들의 생각, 애환, 삶의 모습’을 한국일보사가 출간했다. 1988년 1월부터 1992년 3월까지 4년 간 미주 한국일보에 기고된 ‘유의영 칼럼’을 주제와 내용에 따라 분류해 엮은 책이다. 이민 1세대와 1.5세대, 2세대 간 세대 차이, 한인 공동체의 위기와 변화, 한인으로서 정체성 혼란, 한인과 타민족 간 갈등, 미국에서 바라보는 한국 현안, 한반도 통일 등에 관한 주제들을 놓고 문제를 진단하고 해법을 제시했다.유의영 교수 약력▲1937년 서울 출생▲1961년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졸업▲1963년 유학차 도미▲1969년 펜실베니아대 사회학 박사▲1968년 칼스테이트 LA 교수 및 동대학 부설 한국학연구소장▲1970년-78년 서울대 인구 및 발전문제 연구소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