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낙태 권리를 보장한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뒤집기로 했다고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가 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판결 전망과는 별개로 연방 대법원의 결정문 초안이 유출되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하면서 파장이 일고 있다.
폴리티코는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는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이 작성해 대법원 내 회람한 다수 의견서 초안을 입수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에는 ‘로 대 웨이드’로 불리는 1973년 연방대법원 판결로 여성 낙태권이 확립돼 있다.
임신 약 24주 뒤에는 태아가 자궁 밖에서 생존할 수 있다고 보고 그전에는 낙태를 허용하는 내용의 판결이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 법관 구성이 보수 우위로 바뀐 연방대법원이 판결을 뒤집을 수 있다는 전망이 제기돼 왔다.
폴리티코가 입수한 초안에서 얼리토 대법관은 로 대 웨이드 판결에 대해 “시작부터 터무니없이 잘못됐다”며 “논리가 매우 약하고 판결은 해로운 결과를 초래했다. 낙태에 대한 국가적 합의를 끌어내기는커녕 논쟁을 키우고 분열을 심화했다”고 적었다.
이어 “우리는 판결을 뒤집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헌법에는 낙태에 대한 언급이 없고 어떤 헌법조항도 낙태권을 명시적으로 보호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폴리티코는 공화당 정부에서 임명한 다른 대법관 4명도 대법관 회의에서 얼리토와 같은 의견을 냈고 여기에는 아직 변화가 없다고 전했다.
민주당 정부에서 임명된 대법관 3명은 소수 의견을 작성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어떻게 결정할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보수 성향으로 분류된다.
폴리티코 보도에 따르면 최소 5명의 다수 대법관이 낙태 허용 판결을 뒤집겠다는 의견을 갖고 있는 것이다. 다만 대법관들이 회람 과정에서 초안을 여러 번 작성하고 판결을 내리기 며칠 전에도 의견을 바꿀 수 있다고 폴리티코는 설명했다.
연방대법원이 판결을 통해 낙태권에 대한 헌법 보호를 무효로 하면 이후 각 주 차원에서 낙태 허용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뉴욕타임스(NYT)는 미국 50개 주 중 절반에서 낙태를 금지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폴리티코 보도 이후 분노한 낙태권 옹호론자들 수백명이 대법원 앞으로 몰려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같은 장소에서 낙태를 반대하는 시민들의 시위도 열렸다.
초안 내용의 민감성과 별개로 극도의 보안이 유지되는 결정문 초안이 유출됐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파장이 커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대법원 대법관들의 내부 논의 내용이 판결 전 유출돼 보도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뉴욕타임스(NYT)·로이터통신 등의 3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서 대법관의 내부 논의 내용이 정식 발표 전 외부로 유출된 것은 현대 사법 사상 이번이 처음이다.
미 연방대법원은 그간 결정에 대한 신뢰 확보를 위해 내부 논의에 대한 철통 보안을 지켜 왔다.
대법원 내부 관계자가 논의 내용을 유출하면서 대법원에 대한 신뢰도 치명적 손상이 불가피해졌다.
법무부 송무차관대행을 지낸 닐 카티알 변호사는 이번 유출 사건을 1971년 베트남전 관련 국방부 기밀 문서 폭로 사건과 견주며 “국방부 기밀문서가 유출된 것과 같다”고 진단했다.
미국의 법조인들이 활동하는 ‘스코터스블로그’(SCOTUSblog)는 트위터에서 “대법관과 직원 사이의 신뢰가 무너졌다는 점에서 이번 유출 사태가 어떤 지각변동을 불러올지 예측하기 어렵다”고 썼다.
유출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측이 나돌고 있다. 진보 성향 대법관 혹은 재판연구관이 ‘낙태권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판결이 내려지는 것을 여론으로 뒤집기 위해 초안을 유출했다는 관측이 있다.
반대로 보수 성향 대법원 관계자가 판결에 따른 영향을 희석시키기 위해 초안을 유출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