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인공지능 AI 칩 선두 주자 엔비디아 H20 칩의 중국 수출을 제한했다.
이는 '미국 우선주의' 기조를 내세운 트럼프 행정부가 자국 반도체 산업을 상대로 부과한 첫 수출 제한 사례로, 조 바이든 전 대통령 행정부 때부터 부과해 온 대중 반도체 수출 제한 수위를 한층 더 강화한 것이다.
전세계를 상대로 관세전쟁을 벌이고 있는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에 대한 압박을 강화한 것으로도 풀이된다. 중국 기업으로부터 대량 주문을 받아온 엔비디아는 수조 원의 타격을 입게 됐다.
어제(15일) 로이터 통신, 뉴욕타임스 등에 따르면 미 상무부는 엔비디아의 H20 칩을 중국으로 수출할 때 새로운 수출 허가 요건을 적용한다고 밝혔다.
AMD의 AI 칩 MI308을 비롯해 이에 상응하는 다른 칩들도 이번 규제 대상에 포함됐다고 상무부는 덧붙였다.
엔비디아도 이날 지난 9일 연방 정부로부터 H20 칩을 중국 수출 시 당국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밝혔다. 또 14일에는 이 규제가 무기한 적용될 것이라는 통지를 받았다고 전했다.
엔비디아는 H20 칩이 중국의 슈퍼컴퓨터에 사용되거나 전용될 수 있다는 우려를 미 정부가 새 규제의 근거로 들었다고 설명했다.
연방 정부는 2022년 바이든 전 행정부 때부터 안보를 이유로 미국산 최첨단 반도체의 대중 수출을 규제해 왔다.
이에 엔비디아는 규제를 피하기 위해 기존 H100 칩에서 성능이 낮아진 H20 칩을 제작해 중국에 수출해왔는데, 이번에 트럼프 행정부가 해당 규제를 강화하면서 성능이 낮은 H20 칩까지로 수출 제한 조치가 확장된 것이다.
H20 칩은 그간 연방 정부의 규제 적용을 받지 않는 한도 내에서 중국에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최고급 사양의 AI 칩이었다.
연산 능력은 낮지만, 고속 메모리 및 기타 칩과의 연결성이 뛰어나 슈퍼컴퓨터를 만드는 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엔비디아의 최신 AI 칩 블랙웰보다 성능은 낮지만, 블랙웰에서 사용되는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장착돼 일부 성능이 개선됐다.
특히,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가 지난 1월 저가형 우수 AI 모델을 선보이며 주목받았다. H20은 딥시크가 AI 모델 학습에 사용한 칩 중 하나로 알려졌다.
한편 이날 수출 제한 발표는 엔비디아가 전날 향후 4년간 미국에서 최대 5천억달러 규모의 AI 인프라를 생산하는 내용의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밝힌 지 하루만에 나왔다.
엔비디아는 전날 발표한 투자 계획에서 AI 칩 제조 뿐 아니라 AI 슈퍼컴퓨터 등 AI를 개발하고 실행하는 데 필요한 하드웨어를 앞으로 미국 내에서 생산하겠다고 밝혔다.
미 제조업을 부흥시키겠다며 기업들에게 미국에서 제품을 생산하라고 압박해 온 트럼프 행정부의 기조에 발맞춰 미국 내 제조 역량을 강화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트럼프 행정부가 벌이고 있는 미중 무역전쟁의 여파를 피해가진 못하게 됐다.
이번 수출 제한 조치로 엔비디아는 회계연도 1분기(2∼4월)에 55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이는 재고, 구매 약정, 관련 충당금 등에 따른 비용이다.
앞서 IT 전문 매체 디인포메이션은 알리바바와 텐센트, 바이트댄스 등 중국 기술 대기업이 올해 1∼3월 H20 칩을 160억 달러 이상 주문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는 지난 분기보다 40% 웃도는 규모로, H20 칩에 대한 수출 규제를 앞두고 주문이 급증했다. 엔비디아의 수조원대의 비용 발생은 이 같은 막대한 주문량을 사실상 공급하지 못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미 정부는 2022년 10월 엔비디아를 비롯한 AI 칩 제조업체들의 중국 수출을 처음 제한한 데 이어 그 대상과 국가를 확대해 오고 있다.
이에 이날 뉴욕 증시 정규장에서 1.3% 상승했던 엔비디아 주가는 시간 외 거래에서 6.3% 하락했다.
앞서 지난 9일 미 공영방송 NPR은 트럼프 행정부가 H20 칩에 대해 중국 수출을 제한하려던 계획을 철회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는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지난주 트럼프 대통령의 사저가 있는 마러라고 만찬에 참석한 이후로, 황 CEO가 이 만찬에서 미국 내 AI 데이터 센터에 대한 새로운 투자를 약속한 뒤 방침이 변경됐다고 이 매체는 전했다.
뉴욕증시 시간외거래에서 엔비디아는 6% 이상 급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