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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發 '에너지 무기화' 쇼크, 세계 정치도 휘청


최근 전 세계에선 급격한 인플레이션에 따른 경기 침체 여파로 정치 권력의 변화, 시대에 역행하는 석탄발전소로의 회귀 등이 이뤄지고 있다. 이 세 가지 흐름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 바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내세운 ‘에너지·곡물의 무기화’에 전 세계가 휘청거리고 있는 것이다.

먼저 미국과 유럽 각국 정상은 러시아의 ‘에너지·곡물’ 무기로 정치적 상처가 깊어지고 있다. 프랑스가 그 유탄을 가장 먼저 맞았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이끄는 르네상스당을 비롯한 여권 ‘앙상블’은 19일(현지시간) 하원 결선투표 집계를 마무리한 결과 전체 577석 중 245석을 얻는 데 그쳤다. 하원 의석의 과반인 289석에 44석 모자라는 것으로, 프랑스 집권여당이 하원에서 과반의석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20년 만에 처음이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마크롱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마비될 위험에 직면했다”고 평가했다.

러시아 국영 가스기업 가스프롬은 최근 이틀간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체코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량을 대폭 감축했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15일부터 송유관을 통한 가스 공급이 아예 중단됐다. 마크롱 대통령은 가스·전기료 상한선 설정 등을 통해 지지층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선거를 앞둔 다른 국가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독일은 10월에 민심 이정표로 불리는 니더작센에서 주의회 선거가 치러질 예정이며, 이탈리아도 다음 해 6월 총선 일정이 잡혀 있다. 미국은 11월 중간선거가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사람들이 극한까지 버티고 있다. 언젠간 터질 것이다. 그땐 초대형 시위가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한 한 시민의 인터뷰를 게재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보복으로 러시아가 가스 공급을 대폭 줄임에 따라 유럽에서 가스 배급제가 실시될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고 보도했다.

영국에선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대규모 파업이 예정돼 큰 사회 혼란이 우려된다. 영국 철도해운노조(RMT) 산하 조합원 4만여명은 21부터 사흘간의 파업을 벌이기로 했다. RMT는 1926년 이후 전국 단위의 총파업 가능성도 제기했다. 자칫 마거릿 대처 전 총리 시절 이후 최악의 대중 교통·운송 혼란이 예상된다. 영국 교사 노조인 전국교육노조(NEU)도 파업 투표를 진행할 계획이다. 영국의 소매물가지수(RPI) 상승률은 4월 11.1%를 찍으며 4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러시아의 가스 공급 중단으로 탈석탄 정책도 흔들리고 있다. 독일 경제부는 이날 전력 소비량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겨울을 대비해 석탄화력발전소 재가동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에너지 대책을 발표했다. 로베르트 하벡 독일 부총리 겸 경제장관은 “올해 겨울을 대비해 천연가스를 최대한 비축하는 것이 현시점에서 절대적 우선순위”라며 “석탄 사용에 대한 법률은 다음 달 8일 연방 상원에서 승인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하벡 부총리는 “우리를 흔들고, 가격을 높여 우리를 분열시키려는 푸틴 대통령의 전략”이라고 비판했다.

독일의 이번 조치는 올라프 숄츠 총리가 이끄는 사회민주당(SPD)을 비롯해 녹색당, 자유민주당(FDP) 등 연립여당이 오는 2030년까지 석탄 사용량을 줄이겠다고 공언한 내용과는 상반된 행보다.

독일에 이어 오스트리아 정부도 폐쇄한 석탄발전소를 재가동한다고 발표했다. 재가동 대상은 남부도시 멜라흐에 있는 발전소로 오스트리아 정부의 재생에너지 정책에 따라 2020년 봄에 문을 닫은 뒤 마지막 남은 석탄화력발전소다. 카를 네함머 오스트리아 총리는 "비상시 필요한 경우 석탄발전소에서 전기를 생산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며 "국가의 공급을 확보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라고 말했다. 오스트리아는 국가 가스 공급의 80%를 러시아에서 들여왔다.

호주도 에너지안보이사회(ESB)가 석탄·가스 발전소에 보조금을 계속 지급하는 방안을 담은 에너지 대책 관련 초안을 발표했다. 전력난 사태를 막기 위한 방안이지만 '탄소중립'을 달성하는 데 혼란이 가중될 것이라고 지역 언론들은 비판하고 있다.

경기 침체와 곡물가격 급등도 계속 이뤄질 전망이다. WSJ와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중남부를 중심으로 보리와 밀 등의 수확기가 본격 시작됐지만 저장고(사일로)가 턱없이 부족한 상태다. 지난해 수확한 곡식이 제때 해외로 수출되지 못한 채 사일로를 비롯한 창고에 그대로 쌓여 있기 때문이다. WSJ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바닷길을 봉쇄해 연안 항만을 통한 수출길이 막히면서 기존에 수확한 곡물을 출하하지 못하고 새로운 곡물은 담지 못하는 '병목현상'이 심화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주요 곡물의 공급 부족 등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가입국의 4월 소비자물가는 무려 9.2% 상승했다. 외환위기 시절이던 1998년 9월(9.3%) 이후 34년 만의 최고 상승률이다. 가장 많이 오른 품목은 식료품(11.5%)이었다.

이에 유럽연합(EU) 외무장관들은 20일 룩셈부르크에서 회의를 열고 러시아가 흑해 항구를 봉쇄하면서 우크라이나에 발이 묶인 곡물을 수출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한다. EU는 러시아 식품 및 비료 수출을 촉진하는 대가로 우크라이나의 해상 봉쇄를 해제하는 쪽으로 중재하고 있는 유엔의 노력을 지지하지만 러시아가 이를 받아들일지 미지수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장기전으로 돌입함에 따라 서방 지도자들의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19일 영국 선데이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긴 전쟁을 위해 우리 자신을 단련해야 한다는 게 두렵다"고 전했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도 이날 독일 매체 빌트암존탁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전쟁이) 몇 년이 걸릴 수 있다는 사실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창호 선임기자, 한명오 기자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