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기 회장은 한국 정부로부터 민간인에게 수여되는 최고 영예의 하나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지난 2011년 12월 8일 옥스포드 팔레스 호텔에서 열린 홍명기 전 미주동포후원재단 이사장의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서훈 축하행사에 한인 단체장 및 주요인사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박상혁 기자]지난해 한인사회는 큰 어른이자 기둥이었던 홍명기 M&L 홍 재단 이사장을 갑작스럽게 잃었다. 2021년 8월18일 87세의 일기로 타계한 고인은 사업가이자 봉사자, 교육자, 정치 문화의 후원자로서 한인 1세들에게는 봉사의 롤 모델이었고 2세들에게는 용기와 희망을 준 어른이었다. 또, 미주사회를 넘어 모국을 위한 나눔에도 앞장서‘미주 한상의 대부’로 불리며 기부와 나눔정신을 전 세계에 전파했다. 홍 이사장이 타계하자 한인 사회는 깊은 애도를 표했고 고인이 업적을 기리는 추모행사가 곳곳에서 열리며 뜨거운 추모 물결이 오랫 동안 이어졌다. 특히 지난 4월에는 주의회에 고인의 생일인 6월20일을 ‘홍명기의 날’(HR106)로 제정하는 결의안이 최석호 가주하원의원에 의해 발의돼 두 달만에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캘리포니아주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에 이어 생일을 기리는 두 번째 한인이 된 것이다. 고인이 미주 한인사회에 끼친 영향력과 기부 사업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지만 홍명기 이사장 1주기를 맞아 추도의 시간을 갖기를 바라며 고인의 업적과 정신을 간략하게 정리했다.■ 아메리칸 드림 일군 대표적 한상고인은 ‘주류사회에서 벌어 한인을 위해 쓴다’는 평소 철학을 실천한 애국자였다. 그의 부친은 한국의 평화신문과 수도극장(스카라 극장) 사장을 역임했고 동양 최대의 안양종합촬영소를 설립한 고 홍찬씨다.그는 6·25전쟁 직후인 1954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당시 돈을 가져 올 수 없어 500달러를 들고 건너왔다. 1959년 UCLA 화학과를 졸업한 후 페인트회사에서 일하다가 51세에 ‘튜라코트’를 창업했다.이 회사는 산업·건축용 특수도료를 개발해 연 매출 3억 달러를 달성하며 세계 특수페인트 시장 ‘톱 5’로 성장했고, 홍 이사장은 아메리칸 드림을 일군 대표적 한상으로 주목을 받았다.■4.29 폭동, 도산 정신으로 깨우쳐성공한 사업가로 안주하던 홍명기 이사장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 사건은 1992년 4월29일 발생한 LA폭동이었다. 홍 이사장은 “4.29 폭동 소식을 보고 들으며 ‘그동안 비겁하게 뒤에서 나만 잘 살겠다는 생각을 했구나’ 싶었다”며 “이를 계기로 역량이 허락된다면 한인 사회로 나가 무슨 일이든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늘 밝히곤 했다.홍 이사장은 그 당시 부시 대통령이 직접 LA 한인타운을 방문해 한인사회 구성원과 만났을 때 “우리 입장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대변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며 그 원인으로 인재부족을 꼽았다. 이 후 그는 교육과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차세대 육성이라면 발벗고 나서는 열정을 바쳤다.■ 재단 통해 기부의 삶 실천캘리포니아주 한인사회의 든든한 후원자로 자리매김해 온 고 홍명기 이사장의 업적은 한인 사회에서는 그 어떤 사람도 비견치 못한다. 사재 1,000만 달러를 들여 2001년 M&L 홍 재단의 전신인 ‘밝은미래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을 통해 미주한인사회의 숙원 사업 해결에 적극 나섰다. 남가주한국학원 이사장 재직 시절이던 1999년 350만달러 기금모금에 성공해 폐교 위기에 몰렸던 학교를 살려낸 것을 비롯 도산 동상 제막, LA대한인국민회관 복원, LA 카운티뮤지엄 한국관 설립, UCLA 코리안 아메리칸 석좌교수직 신설, UCLA 화학과 장학기금, 한미박물관 건립기금 기부, UC 리버사이드대 김영옥 연구소 등이 그의 기부로 낳은 결실이다.■ 이민 1세대 책임의식 가져야고인의 생애에는 ‘일관된 원칙’이 있다. 한인사회 구성원과 차세대가 ‘자부심’을 갖고 미국 땅의 떳떳한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이민 1세대로서 나의 경험과 자산을 한인사회 발전에 보태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생전에 홍 이사장은 “이민 1세대들이 올바른 리더십을 갖고 모범을 보여 2세, 3세들이 미국사회에서 성공해 언젠가는 한인 이민사회에서 미국 대통령이 배출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2003년 국민훈장 동백장, 2011년 외국인이 받을 수 있는 사실상 최고의 대한민국 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한 홍명기 이사장은 당시 “해외동포 750만명을 대표하라는 사명을 받았다”며 “남은 여생을 한인사회 차세대 육성에 힘쓰겠다”며 강조하고 몸소 실천했다.“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했을 뿐”고 홍명기 이사장은 미주 한인들의 영원한 ‘롤 모델’이다. 성공한 사업가일 뿐 아니라 기부ㆍ장학사업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통해 사회 환원을 몸소 실행했기 때문이다.고인이 미국에 건너간 건 고등학교 졸업 직후인 1954년. 미국에 가는 일이 쉽지 않던 시절, ‘큰 무대에서 큰 꿈을 꾸라’는 선친 말씀에 도미를 결심했다. UCLA 화학과를 졸업한 후에는 26년간 합성수지 등을 다루는 회사에서 근무하며 제품 개발을 담당했다.홍 이사장은 만 51세가 되던 1985년 듀라코트를 창업한다. 듀라코트는 건축용 철근에 발라 내구성을 높여주는 코팅재를 만드는 회사다. 듀라코트는 창업한 지 10년이 채 되지 않아 이 분야의 주목할 만한 회사로 부상했고 미국 내 시장점유율 1위의 회사로 성장했다.그가 말한 사업 성공의 비결은 단순하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는 것이다.그는 “도산 안창호 선생은 미국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던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오렌지 한 개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애국애족하는 길’이라고 말했다”며 “한국인을 대표한다는 마음으로 약속은 꼭 지키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더니 사업은 절로 번창했다”고 말했다.고인은 세계한상대회 개최를 주도하면서 ‘리딩 CEO 포럼’ 공동의장을 맡아 한국 청년들을 위한 장학사업과 해외취업 지원 등에 앞장섰다. 한상 사회공헌재단 ‘글로벌한상드림’을 설립해 이사장을 맡았고, 솔선해 10만 달러를 기부하는 등 세계 한상들 사이에서 ‘대부’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