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8월 한·중 수교는 냉전 종식과 중국의 개혁개방, 한국의 북방 정책이 맞물려 성사됐다. 그 당시 중국은 폐쇄주의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고 때를 기다리며 힘을 기른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를 대외 정책 기조로 삼아 국내 발전에 집중하던 시기다.
한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고 중국과 수교하면서 우방이던 대만과 단교하는 등의 비용을 치렀지만 국익과 실리 측면에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은 필요한 일이었다. 한국은 비교우위에 있는 고부가가치의 핵심 중간재를 중국에 수출해 주력 산업을 성장시켰고 중국도 이를 통해 산업 고도화를 달성했다. 이러한 상호 보완적인 산업구조는 한·중 관계를 지탱하는 근간이었다.
그러나 수교 30년이 지난 지금 한·중을 둘러싼 정치, 경제, 안보 지형은 급변했다. 중국이 미국과 패권을 다투는 G2 국가로 성장하면서 미·중 갈등은 한·중 관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됐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과 함께한다는 기존의 ‘안미경중’이나 민감한 현안에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는 식의 외교 전략은 더 이상 지속하기가 어려워졌다는 평가다. 사드 배치나 북핵 문제 모두 미·중 경쟁의 틀로 들어오면서 해법을 찾기가 더욱 복잡해졌다.
미·중은 전방위 분야에서 격돌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주도하는 안보협의체 ‘쿼드(Quad)’와 다자 경제협력체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는 중국 견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조만간 예비회의가 열리는 미 정부 주도의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 ‘칩4’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이러한 협의체들을 통해 21세기 무역 규범을 새로 수립하고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해 경제 안보를 달성하려는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은 그 과정에서 인도·태평양 지역의 핵심 동맹인 한국이 중요한 역할을 하길 기대하고 있다.
중국은 거대한 시장을 앞세워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 중국 외교부는 지난달 말 정례브리핑에서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 속에서도 지난해 한·중 교역액(3015억 달러)이 한·미, 한·일, 한·유럽연합(EU) 교역을 모두 합한 것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한국이 지난해 수출한 반도체의 60%가 중국 시장에 들어왔다고 강조했다. 반도체는 미국의 견제가 집중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분야로 중국은 자급자족형 산업 구조를 만들기 위해 국가 차원의 투자를 쏟아붓고 있다.
대만 문제도 한·중 갈등의 불씨가 될 가능성이 있다. 중국은 문재인정부 때인 지난해 5월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사상 처음 ‘대만해협에서의 평화·안정 유지의 중요성’ 문구가 포함됐을 때 “불장난하지 말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 문구는 윤석열정부 출범 직후 지난 5월 열린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도 들어갔다.
베이징 외교 소식통은 21일 “중국에 대만은 홍콩, 신장, 티베트 등 분리독립 움직임과 인권 문제가 제기되는 모든 지역을 다 합친 것보다 중요한 핵심 사안”이라며 “미국은 이를 간파하고 대만 문제로 계속해서 중국을 압박하고 자극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이 대만 문제를 쟁점화하는 데 한국이 무조건 미국 편에 서서 동조하는 건 위험 부담이 있다”며 “한·중 수교의 근간인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고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기본 입장을 명확히 한 상태에서 대만 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베이징=권지혜 특파원, 백재연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