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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진보적 헌법, 칠레의 답은 ‘아니오’


보편적인 공공의료, 공공기업 성 평등, 노조 권한 확대, 원주민 자율성 보장, 합법적 낙태, 동물과 자연에 대한 권리 보장, 주거·교육·퇴직금·인터넷 접근·물·위생 등에 대한 합법적인 권리, 그리고 ‘요람부터 무덤까지’의 지원….

전 세계 가장 진보적인 개헌으로 평가받던 칠레의 새로운 헌법이 국민 투표에서 좌절됐다. 일부 개헌 내용이 급격한 사회 변화를 초래할 것으로 보이자 칠레 국민이 ‘반대’에 손을 든 것이다.

칠레 선거관리국(Servicio Electoral)은 4일(현지시간) 개헌 찬반 국민투표 결과 개표율 99.9%인 가운데 찬성 38.1%, 반대 61.9%로 각각 집계됐다고 밝혔다. 과반 찬성 확보에 실패한 개헌안은 부결됐다.

현행 칠레 헌법은 1980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부 독재 시절 제정됐다. 이후 몇 차례 개정은 됐지만 그 근간은 유지됐다.

개헌 논의는 2019년 10월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으로 시작된 반정부 시위에서 촉발했다. 높은 물가와 빈부격차, 불평등한 사회·경제 구조를 개선하자는 시위는 빠르게 전국적으로 퍼졌고 칠레 역사상 최대 규모 시위가 됐다. 이후 칠레 정치 지도자들이 헌법 개정을 약속했고, 2020년에는 칠레 국민 5명 중 4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헌법 폐기에 찬성하는 투표를 했다.

그러나 새로운 헌법에 급격한 사회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면서 여론이 분열됐다.

뉴욕타임스(NYT)는 “많은 유권자는 특히 칠레를 ‘다국적’ 국가로 정의하자는 데에 반대했으며 이는 개헌 거부 운동의 중심축이 됐다”고 평가했다. 대다수의 칠레 국민이 인구의 약 13%를 차지하는 11개 원주민 집단들의 지배 구조를 받아들이고 하나의 자치 국가로 인정한다는 개헌 내용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개헌안 부결로 취임 7개월째인 가브리엘 보리치(36)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도 적잖은 타격이 예상된다.

보리치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에서 “오늘 결정은 우리 정치인들이 더 많이 대화하고 하나로 단결할 수 있는 제안에 도달할 때까지 더 열심히 일할 것을 요구하라는 뜻”이라며 “민주주의는 더 강해진다. 국민의 목소리를 겸허히 듣고, 왜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백재연 기자 energ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