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서거로 큰아들 찰스 왕세자(74)가 평생을 기다린 끝에 찰스 3세로 왕위에 오르게 됐다. 영국 왕세자인 ‘웨일스 왕자’(Prince of Wales)로 책봉된 지 64년 만이다.
찰스 3세는 8일(현지시간) 애도 성명을 통해 “친애하는 나의 어머니 여왕의 서거는 나와 가족 구성원들에게 가장 슬픈 순간”이라고 밝혔다.
찰스 국왕은 “우리는 소중한 군주이자 사랑받았던 어머니의 서거를 깊이 애도한다”며 “온 나라와 왕국, 영연방 그리고 전 세계인이 여왕을 잃은 상실감에 젖어 있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애도와 변화의 기간, 우리 가족과 나는 여왕에게 향했던 폭넓은 존경과 깊은 애정을 생각하면서 위안을 받고 견딜 것”이라고 덧붙였다.
찰스 왕은 일찍이 왕세자로 낙점돼 국왕 수업을 받아왔다. 그는 환경보호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지만 다이애나비와 이혼, 사우디 등에서 거액의 기부금 수수 등 그늘로 인해 어머니만큼의 인기를 누리진 못했다.
찰스 왕은 1948년 11월 14일 여왕과 남편 필립공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2년 여왕이 즉위하면서 거의 평생을 승계 1순위로 지냈다.
어머니가 영국 최장수 군주였으니 찰스 3세는 최장기간 ‘왕세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찰스 3세는 9살이던 1958년 7월 웨일스 왕자에 책봉된 이래 64년간 즉위를 기다렸다.
찰스 3세 아래로는 앤 공주, 앤드루 왕자, 에드워드 왕자가 있다. 다음 승계 순위는 찰스 3세의 아들인 윌리엄 왕세자와 그의 자녀들이 된다.
찰스 3세는 고령으로 건강이 불편한 여왕을 대신해서 최근 역할 대행을 늘려왔다. 올해는 처음으로 의회 ‘여왕 연설’(Queen's speech)이라는 주요한 헌법적 기능을 수행했다.
찰스 3세 국왕은 케임브리지대를 나온 뒤 공군과 해군에 복무하고 1981년 다이애나비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다이애나비의 인기는 영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뜨거웠다. 하지만 정작 찰스 3세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들은 윌리엄과 해리 왕자 두 아들을 낳았지만 1996년 이혼했다.
이 과정에서 다이애나비가 BBC 인터뷰를 통해 남편이 커밀라 파커 볼스와 불륜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큰 논란이 일었다. 찰스 3세와 커밀라 파커 볼스는 각자 결혼하기 전에 사귀었던 사이다.
다이애나비가 이듬해 프랑스 파리에서 파파라치에게 쫓기다가 교통사고로 숨지는 비극이 벌어졌다. 다이애나비 추모 열기가 끓어오른 만큼 찰스 3세를 향한 부정적인 여론이 커졌다.
세월이 흘러 비난이 다소 잦아들면서 찰스 3세는 2005년 커밀라와 결혼했다. 그는 올해 초 여왕이 커밀라를 왕비(Queen Consort)로 인정해주길 바란다고 말했지만 아직까지 영국인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려놓지 못하고 있다.
여왕 즉위 70주년 기념 플래티넘 주빌리에 참석해서 여왕을 향한 존경과 사랑을 표한 영국인들조차도 찰스 왕에게는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그만큼 다이애나비 사건은 찰스 왕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찰스 3세는 왕세자로 오래 지냈고 기후변화 대응 등에 목소리를 높여왔다는 점에서 왕실을 잘 이끌 것이란 의견도 있었다. 다만 다이애나비 사건을 잊을 수 없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찰스 왕은 알카에다 수장 오사마 빈 라덴 가족과 사우디 기업인 등으로부터 거액의 기부금을 받아 자신이 후원하는 자선단체에 보낸 일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 과정에 측근이 훈장 수여를 알선한 일도 있었다.
과거 국정 개입 의혹으로 몇 차례 구설에 올랐다는 점도 위기 요인으로 꼽힌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정부와 국민 사이에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며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원칙을 지켜왔다.
영국이 경기침체 등으로 어려운 시기를 맞은 가운데 호감도가 떨어지고 나이 많은 왕이 등장하면서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젊은 층일수록 군주제에 관심이 없어 왕실의 존재에 대한 회의론이 커질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