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법원이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를 살해한 배후로 지목된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에 대해 면책특권을 인정하고 관련 소송을 기각했다. 빈 살만 왕세자를 비판하는 근거가 된 핵심 사건에 면죄부를 주며 사우디와의 관계 개선에 돌입한 것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3박4일 일정으로 사우디를 국빈 방문하며 미·중의 ‘중동외교’ 경쟁이 본격화하는 모양새다.
6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존 베이츠 워싱턴DC 연방판사는 행정부 측 의견을 받아들여 카슈끄지의 약혼녀와 시민단체가 낸 손해배상청구 등 민사소송을 기각했다. 베이츠 판사는 “빈 살만이 살인에 관여했다는 믿을 만한 주장이 제기됐다”면서도 “지난달 17일 미 법원에 제출된 (외국 지도자로서의) 면책특권을 거부할 힘이 없다”고 밝혔다.
빈 살만 왕세자는 지난 9월 사우디 정부 수반인 총리로 임명됐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베이츠 판사로부터 의견 표명을 요청받고 지난달 17일이 돼서야 이런 입장의 공식 문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원고가 소송을 제기한 시기는 2020년이다. 이에 대해 베이츠 판사는 “살인과 관련한 주장들과 빈 살만이 총리로 임명된 시점 등과 관련해 여전히 불편함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번 기각 결정은 사우디 국왕에게 책임을 묻기 위한 노력의 끝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앞으로 빈 살만 왕세자와 측근들은 미국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됐다.
2018년 워싱턴포스트(WP) 칼럼니스트자 사우디의 반체제 언론인 카슈끄지는 혼인 신고를 위해 튀르키예(터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을 방문했다가 사우디 정보요원에게 암살됐다. 이 사건으로 미국과 사우디는 물론 미국과 이란의 관계 또한 최악으로 치달으며 중동에서의 긴장감이 고조됐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빈 살만 왕세자를 ‘국제사회의 왕따’로 부르며 강하게 비난했다.
미국이 태도를 바꾼 배경에는 유가 급등 등 경제적 이유가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가가 크게 올라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작용하자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7월 사우디를 직접 방문해 빈 살만 왕세자에게 원유 증산을 요청했다. 그러나 증산을 약속받지 못하고 귀국해 ‘굴욕 외교’ 비판을 받은 바 있다.
틈이 벌어진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를 비집고 들어오는 중국의 행보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시 주석은 7일 사우디에 도착한 뒤 빈 살만 부자를 만나고 중국·아랍 정상회의와 중국·걸프협력회의(GCC) 정상회의에도 참석한다. 중동에서의 영향력 강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사우디가 바이든 대통령의 석유 증산 요청을 무시한 지 두 달 만에 시 주석에게 레드카펫을 깔아줬다”고 평가했다. 사우디 분석가인 알리 시하비는 AFP통신에 “미국은 시 주석의 방문에 대해 우려하고 있지만 이미 강력해진 중국과 사우디의 관계가 약화하진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박재현 기자 j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