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금융시장을 뒤흔든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태가 금융규제의 상징이었던 ‘도드-프랭크법’의 개정으로 초래됐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2018년 법 개정을 통해 중소·지방 은행에 적용됐던 규제를 풀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향한 책임론이다. SVB와 뒤이어 파산한 시그니처뱅크의 간부 상당수가 관료 출신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회전문 인사’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13일(현지시간) SVB 사태와 관련한 대국민 연설에서 미국 중소은행들이 잇따라 파산한 배경에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 이뤄진 금융규제 완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도드-프랭크법을 언급하며 “2008년(글로벌 금융위기)의 재발을 막기 위한 규칙이 마련돼 있었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규제 중 일부를 철회했다”고 질타했다.
블룸버그통신도 이날 보도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규제 완화가 SVB 사태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을 내놨다.
입법자 이름을 딴 도드-프랭크법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2010년 7월 발표한 광범위한 금융규제 법안이다.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촉발된 2008년 금융 위기의 재발을 막겠다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금융회사 규제 강화, 금융감독기구 개편, 지급결제시스템 감독 강화 등을 골자로 한다. 1930년대 상업·투자은행을 분리한 글래스-스티걸법 이후 가장 강력한 금융규제로 평가된다.
이 법을 발의한 바니 프랭크 전 하원의원은 2013년 정계를 떠난 뒤 2015년 시그니처뱅크 이사회 의원으로 부임했다. 그는 이사회에 합류한 뒤 소규모 은행에 적용되는 도드-프랭크법 기준을 완화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해왔다. 자기가 발의한 법안의 기준을 낮춰야 한다고 목소리를 낸 셈이다.
이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금융규제 완화 방침과 맞아떨어졌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18년 ‘글로벌 시스템 중요은행’(G-SIB)으로 분류되는 대형 은행을 제외한 나머지 중소·지방은행에 적용됐던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기존에는 자산 규모가 500억 달러 이상인 금융기관은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로부터 이른바 ‘스트레스 테스트’라고 불리는 재무 건전성 평가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은 “중소·지방은행들을 대형은행들과 같은 방식으로 규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며 규제를 받는 자산 규모 기준을 2500억 달러 이상으로 상향 조정했다. 중소·지방은행에 경쟁적인 환경을 제공해야 대형은행 중심의 과점 체제를 타개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당시 “도드-프랭크법 때문에 기업인들이 돈을 빌릴 수 없다”며 이 법을 금융시장의 재앙이라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법 개정 덕에 자산 규모가 500억 달러 이상~2500억 달러 이하인 여러 중소형 은행들은 이전까지 받아야 했던 스트레스 테스트를 격년으로 받거나 면제받았다. SVB와 시그니처은행 역시 여기에 포함됐다.
도드-프랭크법 개정이 SBV 사태의 시발점으로 작용했다는 비판과 함께 관료 출신 인사가 민간기업인 은행의 수장으로 부임했다는 ‘회전문 인사’도 문제 요소로 제기됐다. 이들이 입안 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사실상 은행에 유리한 방향으로 개정 논의를 유도했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3일 “SVB와 시그니처뱅크는 모두 정책 입안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프랭크 전 의원뿐 아니라 2015년부터 SVB 이사회에서 활동해 온 메리 밀러 역시 오바마 행정부 당시 재무부 차관보로 근무했다. SVB의 수장인 그레그 베커도 샌프란시스코 연방준비은행(연은) 이사회에서 활동했다.
베커가 2015년 연방상원 은행·주택·도시문제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내뱉은 발언도 재조명됐다. 그는 당시 도드-프랭크법 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베커는 “G-SIB들을 위한 도드-프랭크법의 틀은 SVB나 우리와 규모가 비슷한 은행들엔 적절하지 않다는 증거가 명확하다”며 “비용이 우리에게만 높은 것이 아니라 우리 고객들에게도 높다”고 개정을 촉구했다. 또 SVB는 단지 돈을 대출해주는 은행일 뿐이라며 G-SIB처럼 까다로운 규제를 받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WSJ는 지난해 SVB에 등록된 로비스트 7명이 모두 관료 출신으로 확인됐다고 전했다. 시그니처은행은 2018년 법 개정을 앞두고 공화당 출신의 뉴욕주 전 상원의원인 알 다마토를 영입해 로비 활동을 벌였다고도 지적했다.
진보 성향 싱크탱크인 경제정책연구소(CEPR)의 제프 하우저는 은행 규제와 관련된 정책 입안을 수년간 추진해온 프랭크 전 의원이 시그니처은행 이사에 부임한 것을 두고 “케이크도 먹고 떡도 먹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WSJ에 말했다.
다만 프랭크 전 의원은 자신이 도드-프랭크법 개정을 주장해 온 이유가 시그니처은행에 합류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법 개정은 소규모 은행의 서류 작업을 많이 줄여준 좋은 변화”라며 “시그니처뱅크에 합류하기 전인 2013년부터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해왔다”고 반박했다.
송태화 기자 alv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