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자신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한 다음 날 우크라이나 점령지를 공개 방문했다. 국제사회가 자신을 ‘전쟁범죄자’로 규정하자 전쟁 피해가 극심했던 피해 지역을 찾은 것인데 국제 사회를 향한 ‘조롱’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러시아 관영 타스통신은 19일(힌지시간)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도네츠크·루한스크) 지역을 사상 처음으로 방문했다고 보도했다. 타스 통신은 크렘린궁 발표를 인용해 “푸틴 대통령이 (도네츠크주) 마리우폴을 실무방문해 시내 여러 장소를 시찰하고 현지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눴다”고 전했다. 이어 “푸틴 대통령이 거리를 따라 차량을 몰면서 여러 차례 정차했고, 마라트 후스눌린 부총리가 동행하며 마리우폴과 시내와 교외 지역 재건과 관련한 세부상황을 보고했다”고 전했다. 크렘린궁은 방문 일시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나 AFP 통신은 18일이라고 보도했다.
푸틴 대통령이 지난해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시작한 뒤 우크라이나 내 점령지를 방문 사실을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과거 ‘특수군사작전(전쟁) 지역’을 방문했다고 밝힌 적은 있었지만 구체적인 지역을 공개하지는 않았다.
푸틴 대통령이 마리우폴을 공개 방문한 것은 국제사회를 향한 조롱으로 풀이된다.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지난 17일(현지시간) 푸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ICC에서 체포영장이 발부된 국가원수급으로는 수단의 오마르 알 바시르 전 대통령,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에 이어 세 번째 사례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방문은 지난 1년 사이 푸틴 대통령이 전선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것”이라면서 “(크림반도와 마리우폴) 고위급 방문은 ICC 체포영장 발부에 대한 크렘린의 항변 제스처이기도 하다”라고 풀이했다.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트위터를 통해 “도둑답게 (푸틴은) 밤을 틈타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을 방문했다”고 비난했다. 이어 “(밤에 방문한 것은) 첫째 더 안전하다. 그리고 어둠은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을 강조할 수 있게 해 주고, 그의 군대가 완전히 파괴한 도시와 몇몇 살아남은 주민들의 눈을 피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비꼬았다. 미하일로 포돌랴크 대통령실 보좌관은 트위터에 “범인은 항상 범죄 현장으로 돌아온다”면서 “수천명의 마리우폴 가족을 살해범이 폐허가 된 도시와 무덤을 감상하러 왔다. 냉소주의와 회한의 부족”이라고 비난했다.
앞서 ICC 전심재판부(Pre-Trial Chamber)는 홈페이지에 올린 성명을 통해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점령지에서 아동을 불법적으로 이주시킨 전쟁범죄 행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볼만한 합리적 근거가 있다고 밝혔다.
수사를 총괄하는 카림 칸 ICC 검사장은 “우리가 확인한 사건에는 최소 수백명의 우크라이나 아동이 고아원과 아동보호시설에서 납치돼 (러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사실이 포함된다”며 “아동 다수가 이후 러시아에 입양된 것으로 의심된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이 공개 방문한 마리우폴은 가장 참혹한 전쟁 범죄가 저질러진 지역 중 하나다. 지난해 3월 17일 러시아가 마리우폴의 극장을 폭격해 최소 600여명이 숨지는 참사가 벌어졌다. 당시 극장에는 러시아의 공습을 피해 민간인 1000여명이 모여있었는데, 여기에는 임산부와 신생아도 포함돼있었다. 극장 앞 운동장에는 ‘어린이들’(дети)이란 표식까지 새겨져 있었으나 러시아군은 500㎏ 폭탄 두 발을 떨어뜨렸다. 러시아가 지난해 5월 마리우폴을 완전히 점령하는 과정에서 마리우폴에서는 2만명이 넘는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마리우폴 주민 중에는 사상검증, 세뇌 뒤 러시아 본토로 강제이주를 당한 이들이 많았다는 증언도 나왔다.
김판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