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더 오래 일해야 합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올해 신년 연설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부채에 의존해 연금재정을 조달할 것이므로 결국 연금제도가 위협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집권 초창기부터 연금개혁 필요성을 강조해 온 그는 누적되는 연금재정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연금제도 개혁이 불가피하다고 밀어붙이고 있다.
최근 프랑스 정부는 연금 수령 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올리는 내용 등을 포함한 연금제도 개편을 강행하고 있다. 연금을 타는 노인은 늘어나는 반면 이를 부담하는 젊은 근로자 수는 줄어드는 탓에 재정 부족이 심화하는 것은 선진국이 공통으로 고민하는 문제다.
주요 외신에 따르면 엘리자베트 보른 프랑스 총리는 지난 16일(현지시간) 하원에서 연금개혁 법안에 대한 표결을 생략하고 바로 입법할 수 있는 헌법 49조 3항을 발동하겠다고 밝혔다. 법안이 상원을 통과했으나 하원 통과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자 마크롱 대통령과 보른 총리가 ‘결단’을 내린 것이다. 하원은 이에 반대해 ‘내각 불신임안’을 낸 상태다. 현재 의회 구도상 불신임안은 통과 가능성이 작아 연금개혁안은 마크롱 대통령 뜻대로 의회를 통과할 가능성이 크다.
프랑스 정부의 연금개혁안은 2030년까지 법정 퇴직 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높이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 오는 9월부터 정년이 1년에 3개월씩 점진적으로 연장돼 2030년에는 목표 연령이 64세에 이르게 된다. 또 연금 100%를 받기 위해 기존에는 42년을 근무해야 했지만 개편안에서는 43년으로 연금 가입 기간도 1년 더 늘어난다.
대신 최저 연금 수령액은 기존 최저임금의 75%에서 85%인 1200유로(약 160만원) 이상으로 보장된다. 경찰관, 교도관, 항공 관제사 및 기타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고된 업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은 조기 퇴직할 수 있다. 기존 제도에서 철도 노동자, 전기·가스 노동자 등은 특별연금제도하에 퇴직 연령과 혜택이 다르지만, 이 같은 특별연금제도도 폐지된다.
2017년 집권한 마크롱 대통령의 연금제도 개편 시도는 두 번째다. 2019년 그는 프랑스의 42개의 민간 및 공공 부문 연금을 하나의 보편적인 제도로 통합하는 내용의 연금제도 개편을 처음 시도했다. 당시 개편안은 정년을 의무적으로 늘리는 대신 64세까지 일한 사람에게는 보너스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벌금을 부과하는 내용 등을 담았다. 그러나 노조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긴 운송 파업 등으로 대응하며 7주 동안 국가를 마비시켰다. 이후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연금개편 계획이 보류됐다.
프랑스는 전 세계에서 연금제도가 가장 잘 마련된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프랑스의 순연금대체율(은퇴 소득이 은퇴 이전 소득을 대체하는 비율)은 풀타임 근로자 기준 74%다. 이는 OECD 평균인 62%나 유럽연합(EU) 평균 64%보다 높은 수치다. 또 프랑스에서는 퇴직자의 4.4%가 빈곤선(적절한 생활에 필요한 최소 소득) 이하로 생활하고 있으며 이는 OECD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그러나 고령화 현상으로 연금재정 적자가 급격히 불어나고 있다. 프랑스 정부에 따르면 1960년대 초에는 퇴직자 1명당 4명 이상의 근로자가 연금 지출을 감당할 수 있었다. 이른바 부양비가 4.0 이상이었다. 그러나 이 수치는 2020년 1.7로 떨어졌고, 2070년 1.2로 예상된다.
이 탓에 프랑스 연금시스템은 올해 18억 유로(약 2조5200억원) 적자를 기록할 전망이다. 연금자문위원회에 따르면 이 수치는 2025년 107억 유로(약 14조9800억원), 2035년 212억 유로(약 29조6900억원)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연금 적자 해소를 위해 세금 인상, 연금 수령액 인하, 공공 부채 추가 등 대안이 제시됐지만 마크롱 정부는 모두 어렵다고 봤다. 조세율은 이미 충분히 높으므로 세금 인상은 어렵다. 프랑스의 2021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세금 비율은 45.1%로, OECD 평균 34.1%보다 월등히 높다. 또 프랑스는 2021년 GDP의 약 14.5%를 연금에 지출했다. 미국(7.5%) 독일(10.4%) 등 다른 선진국에 비해 국가의 연금재정 지원도 이미 많은 수준이다.
프랑스 정부는 정년 연장을 하면 현재 상대적으로 저조한 수준인 노인 경제활동을 늘릴 수 있다고 기대한다. 프랑스에서 55~64세 고용률은 56%인데, 이는 EU 59%와 OECD 61%보다 낮다.
그러나 마크롱 대통령의 연금개혁은 거센 반발에 부딪히고 있다. 프랑스 최대 노조 중 하나인 관리직총동맹(CFE-CGC)은 프랑스 전체 인구의 70%와 근로자의 94%가 연금개혁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철도 노동자, 전기·가스 노동자 등도 특별연금제도 폐지에 반발하고 있다.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의원은 “(이번 연금개혁은) 특히 젊은 나이에 일하기 시작하는 생산직(블루칼라) 노동자에게 끔찍하게 부당하고 비효율적”이라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프랑스인들의 은퇴에 대한 애착은 깊으며, (연금개혁은) 프랑스인의 정체성, 노동권에 대한 자부심을 건드린다”면서 “연금제도를 개편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정부가 아무리 주장해도 프랑스인들은 쉽게 (현행 연금제도를) 뺏기지 않을 것”이라고도 분석했다.
김지애 기자 am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