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 정권에 맞서 시민혁명을 일으켰던 필리핀이 그 독재자의 아들을 대통령으로 맞이하며 다시 36년 전으로 돌아갔다. 러닝메이트이자 ‘스트롱맨’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의 딸도 부통령으로 당선돼 아버지의 권력을 물려받을 것으로 보인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64) 전 상원의원이 9일 치러진 대선에서 오후 8시32분(현지시간) 현재 1754만표를 얻어 경쟁자인 레니 로브레도 부통령(831만표)을 크게 앞선 것으로 비공식 집계됐다고 현지언론들이 보도했다.
그는 1965년부터 86년까지 장기집권했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이다. 아버지 마르코스는 72~81년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정권 인사들을 고문·살해하는 등 21년간 철권통치를 이어간 인물이다. 또 ‘사치의 여왕’으로 악명 높은 부인 이멜다(92)와 함께 국고에서 100억 달러(12조7000억원)라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정부 재산을 빼돌렸다는 비난도 받고 있다.
필리핀 국민은 86년 ‘민중의 힘(People Power)’이란 시민혁명으로 독재자를 막았다. 그는 하와이로 쫓기듯 망명해 3년 후 죽음을 맞았다. 그의 치하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시민단체들은 아들의 대선 출마에 대해 “출마 자격이 없다”고 주장해왔다.
때문에 이번 대선 결과로 시민단체들의 거센 반발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앞서 필리핀의 여러 시민단체는 지난해 11월부터 마르코스 전 의원의 대선 출마를 금지해 달라며 총 6건의 청원을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했다. 공직을 맡았던 82~85년 3년간 소득 신고서를 제출하지 않아 탈세 혐의로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전력도 있다.
필리핀 내 국세법에 따르면 세금 관련 범죄 혐의로 유죄 확정판결을 받으면 공직선거에 나올 수 없다. 선관위는 이들이 제출한 6건의 청원에 대해 근거가 부족하다며 모두 기각 결정을 내렸다. 시민단체들은 선관위 결정에 불복하고 이의를 제기하거나 대법원에 소송을 내기로 한 상태다.
마르코스 전 의원의 당선으로 필리핀의 대외 정책은 두테르테 현 대통령의 ‘친중 노선’ 기조를 이어갈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된다. 그는 대선 출마 후 중국과의 관계를 묻는 현지 언론의 질문에 “두 나라와 직접 대화를 하겠다”고 밝혔다. 동맹인 미국과 상의 없이 중국과의 관계를 독자적으로 설정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두테르테 현 대통령은 수시로 미국 외교정책을 비판하며 친중 행보를 견지해왔다. 또 두테르테 대통령의 장녀 사라 두테르테(43) 다바오 시장이 부통령으로 당선된 것도 이런 전망을 뒷받침한다.
마르코스 전 의원의 어머니인 이멜다의 행보에도 관심이 집중된다. 이멜다는 남편의 대통령 재임 기간에 보석류와 명품 구두 등을 마구 사들이는 등 사치스러운 영부인으로 유명하다. 또 메트로 마닐라 시장과 주택환경부 장관을 역임하는 등 요직을 맡아 왕성한 대외활동을 벌인 인물이기도 하다.
마르코스 전 의원은 최근 CNN필리핀과의 인터뷰에서 “물론 나 자신이 결정해서 대선 후보 등록을 마쳤지만, 어머니의 권유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결국 대통령 취임 후 어머니 이멜다가 막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한명오 기자 myug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