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화 국면에 접어든 우크라이나 전쟁은 2월말 러시아의 침공 초기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무작정 엄청난 병력으로 밀고 들어온 러시아군을 효과적으로 섬멸했던 당시와 달리 대평원인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의 전투는 러시아의 압도적인 원거리 포격 전력에 우크라이나군이 차츰 열세에 놓여가는 형국이다.
이런 가운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미국과 유럽 등 서방을 향해 전향적인 포병 전력 지원을 강력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초기부터 적극 지원에 나섰던 미국과 영국을 제외한 유럽 중심 국가들은 여전히 자신들만을 위한 손익계산에만 몰두하는 모습이다.
뉴욕타임스(NYT)는 13일(현지시간) 전쟁 개시 후 처음으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를 방문키로 한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정상들이 이번 방문을 계기로 대 우크라이나 전략의 주요 방향을 결정할 전망이라면서 “젤렌스키 대통령이 강력히 요구한 무기를 전폭 지원할 것인지, 아니면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빨리 휴전 협상에 나서라고 압력을 가할지 3개국 정상들은 여전히 주판만 튕기고 있다”고 꼬집었다.
영국이 탈퇴한 유럽연합(EU)의 중심 국가인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는 EU의 국제외교 전략과 경제개발 노선 순위를 결정할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세 나라 모두 러시아와 상당한 경제적·정치적 이해관계를 맺고 있어 우크라이나 전쟁 과정에서도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우크라이나 지원정책과 상당한 거리를 취해왔다.
우선 독일은 러시아 국영 천연가스회사인 가즈프롬과 합작 사업에 나설 만큼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에 국가 전체의 경제가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올라프 숄츠 총리는 러시아 침공이 시작된 이후에도 한참동안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금지 조치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가 국제사회로부터 맹비난을 받기도 했다.
프랑스는 냉전시대 절정이었던 1960·70년대부터 친러시아 정책을 펴왔던 대표적인 서방국가 중 하나다. 자신들에 의해 옛 소련 시절 미국과 소련 간의 데탕트(화해) 시대가 열렸다는 외교적 자부심을 가진데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산 석유 의존도가 상당히 높은 상태다. 이탈리아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이들 3개국 정상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공식적으로 “이번 전쟁에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승리해야 한다”고 언급한 적이 없을 정도다. 일방적인 우크라이나 승리가 몰고 올 후폭풍, 즉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의 몰락이 자국 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란 점을 고려한 스탠스란 해석이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지원을 요구하는 미국의 압박에 공식적으로는 “우리도 돕겠다”고 언급했지만, 실제 무기 지원에는 엄청난 생색을 내고 있기도 하다.
NYT는 유럽이 “침략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정의파’ 국가와 “그래도 빨리 휴전시켜 현실적 평화를 얻어야 한다”는 ‘비둘기파’ 국가로 나뉘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의파 국가에는 EU의 외곽지대나 다름없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루마니아 같은 변방국들이, 비둘기파에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가 속해있다”면서 “비둘기파가 진짜 평화를 원하는건지 아니면 자국의 이익만 쫓는 가짜인지는 이번 전쟁 이후 낱낱이 들어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창호 선임기자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