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인플레이션 주범으로 꼽힌 휘발유 가격이 최근 하락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최근의 가격 하락은 경기침체 신호이자 대러 제재 실패의 증거라고 지적했다. 대러 제재가 계속되고 있는 만큼 산유국의 증산이 이뤄지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급등할 여지가 크다는 우려가 나온다.
재러드 번스타인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은 17일(현지시간)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물가 상승을 부채질한 유가가 이번 달 말까지는 계속해서 하락할 것으로 예측한다”고 밝혔다. 아모스 호치스타인 국무부 에너지 안보 특사도 CBS 방송에 나와 “휘발유 가격은 갤런당 4달러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이미 전국에 갤런당 4달러 미만인 주유소가 많이 있다”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가장 빠른 하락률”이라고 말했다.
미 자동차협회(AAA)에 따르면 이날 미국 주유소 휘발유 평균 가격은 갤런(3.78ℓ)당 4.532달러다. 지난달 14일 5.016달러로 정점을 찍은 이후 한 달 넘게 하락 중이다. 텍사스(13.6%), 오하이오(12.3%), 플로리다(12.0%), 위스콘신(12.1%), 사우스캐롤라이나(11.8%), 인디애나(11.3%) 등은 11% 이상 하락했다. 휘발유 가격이 가장 비싼 캘리포니아도 갤런당 가격이 8% 이상 하락한 5.907 달러를 기록하며 6달러 밑으로 내려왔다
최근의 휘발유 가격 하락은 그러나 경기침체 우려에 따른 국제 유가 하락 영향이 컸다. 세계 경제가 둔화하고 있다는 경고등이 켜지면서 수요가 감소했기 때문이다. 특히 코로나19 봉쇄 정책을 택한 중국 경기가 하락한 것도 유가 하락을 부채질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최근의 가격 하락을 자신의 치적으로 적극 홍보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미국 주도의 대러 제재가 실패한 것도 가격 하락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뉴욕타임스(NYT)는 “러시아는 석유 수출 판매처를 유럽시장에서 중국, 인도, 남미 등 지역으로 대체하는 데 성공했다”며 “대러 제재를 강화하면 세계 석유 재고가 급격히 줄어들 것이라는 두려움은 과장된 것으로 판명됐다”고 분석했다.
워싱턴포스트(WP)도 “최근 가격이 하락한 또 다른 주요 이유는 러시아에 대한 제재가 계획보다 훨씬 덜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라며 “제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석유는 세계 시장으로 나와 중국, 인도 등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로 인해 서방 동맹이 예상했던 만큼 글로벌 공급이 빡빡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주 발표된 미국 에너지부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휘발유 수요가 10% 이상 감소했다. 시장이 인플레이션에 적응하면서 활동을 줄이고 있다는 의미다. 이에 따라 유가 추가하락이 당분간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계속되고 있다. 유가 정보업체 가스버디는 “국제유가가 급등하지 않는 한 휘발유 가격 하락 추세는 향후 5주 동안 계속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지금의 가격 하락이 정책 효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경기침체 우려나 대러 제재의 구멍 등으로 인한 수요 감소와 공급 확대 영향이어서 가격 하락은 일시적일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 진단이다.
오일가격정보서비스(OPIS) 톰 클로자 애널리스트는 “더 많은 공급, 더 적은 수요로 인해 여름철 잠시 (가격 인상) 유예기간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JP모건은 러시아가 유럽에 공급을 전면 중단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발생하면 유가가 배럴당 38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경고를 내놨다. WP는 12월 5일 발효되는 유럽연합(EU)의 러시아산 석유의 일부 수입 금지 조치가 국제 유가를 지금보다 50% 급등시킬 수 있다는 미 재무부 내부 분석 보고서를 공개하기도 했다.
대러 제재에 따른 유가 상승은 최소 가을부터 영향을 미칠 공산이 크다. 통상 4~6주가 걸리는 배송 시간을 고려하면 제재에 대비한 석유 입찰이 가을쯤 시작되고, 그로 인해 다시 국제유가가 상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민주당에 재앙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자존심을 굽히며 사우디아라비아를 찾아간 것도 이를 염두에 둔 조치라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호치스타인 특사는 이날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향해 “얼마나 많은 (증산) 여력이 있는지 말하지 않겠지만, 그들은 추가생산 능력이 있다. 그렇게 할 더욱 많은 여지가 있다고 본다”며 이들을 압박했다.
코널 플런캠프 듀크대 교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그에 따른 석유 시장 혼란이 유가 상승의 원인이고, 이는 바뀐 게 없다”며 “OPEC 회원국들은 고유가에 만족하고 있어서, 적어도 1년 동안은 가격이 내려갈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