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장에 대한 접근이 줄면 연구개발에 투자할 자금도 감소하고, 경쟁우위를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법 시행 지침에 유연성이 필요하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 존 뉴퍼 회장은 최근 제정된 자국 반도체지원법(Chips Act)을 설명하며 이같이 말했다. 중국 투자를 막으려고 담아 놓은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이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며 미국 정부에 법 적용 유연성을 주문한 것이다. 뉴퍼 회장은 다만 반도체법이 동맹 간 공급망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이어서 한·미 양국 간 협력 강화에도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뉴퍼 회장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한국 특파원단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한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이 제조업에 대한 ‘인센티브 게임’에 참여했기 때문에 미국 제조 기반이 침식됐다”고 말했다. 그는 “최첨단 로직 칩이 모두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 제조되고 있다”며 “미국은 혁신 게임에서도 뒤처져 있다”는 말도 했다.
미국은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아 가격 경쟁력에서 밀려났고, 그로 인해 반도체 생산 위기를 겪게 됐다는 것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게 반도체법 제정의 이유라는 것이다.
뉴퍼 회장은 미국이 1990년대 세계 반도체의 37%를 생산했지만, 현재는 가격 경쟁력에서 밀려 12%로 줄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보조금으로 다양한 제조업을 유치한 다른 국가는 저 멀리 앞서 나가고 있었고, 우리 제조업은 그냥 무너져 갔다”며 “미국으로서는 이제야 경쟁에 참여한 것”이라고 말했다.
뉴퍼 회장은 그러나 “우리가 전 세계에 있는 모든 반도체 생산을 다시 미국으로 가져오려는 게 아니다”며 “균형을 다시 맞추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각국이 반도체산업 육성을 위해 지원금을 쏟아붓는 보조금 전쟁을 벌이지 않도록 정부 간 정보공유 등 조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도체법에는 미국 내 신규 투자 기업에 재정 지원과 세액공제 혜택을 주는 대신, 해당 기업이 향후 10년간 중국에 새로 투자를 할 수 없도록 한 가드레일 조항이 포함돼 있다.
뉴퍼 회장은 이에 대해 “미 의회가 기술 정책에 있어서 중국을 매우 불안하게 여긴다는 정치적 현실을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삼성과 SK하이닉스 같은 기업이 미국 내 생산을 확대할 수 있도록 상무부 등이 ‘법 시행 지침’에 충분한 유연성을 제공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뉴퍼 회장은 중국 투자 제한이 기업들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미국 기업 매출에서도 중국 비중이 약 35%다. 중국 같은 주요 시장에 대한 접근이 줄어들면 경쟁우위를 유지하기 힘들어진다”고 공감했다. 그는 “(중국 견제와 기업 경쟁력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이 필요하다”며 “한국, 미국, 일본, 유럽연합(EU)의 정책입안자들이 대중국 정책을 수립할 때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뉴퍼 회장은 특히 한국을 향해 “반도체 산업에서 미국과 매우 긴밀하고 신중히 협력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이라며 “일반적인 반도체 정책뿐 아니라 중국과 관련해서도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반도체 분야에서 (한·미) 양국 관계는 이미 매우 보완적이어서 법이 협력을 더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뉴퍼 회장은 동맹 간 공급망 복원 전략 개념인 ‘프렌드 쇼어링’을 언급하며 “반도체산업의 4개 주요국(칩4) 간에는 협력할 영역이 분명히 있다. 칩4 회의를 매우 흥미롭게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칩4 회의에서 공급망 회복력과 세계무역기구(WTO) 강화를 위한 협력, 정보기술협정(ITA) 확대, 지식재산권(IP) 이행·보호 등을 논의할 것을 제안했다.
뉴퍼 회장은 “한국 정부가 지난해 발표한 K-반도체벨트 전략과 7월에 공개한 국가반도체전략 로드맵을 매우 주목한다”며 “모든 혁신적 기업에 혜택이 제공될 수 있도록 한국 정부의 반도체산업 인센티브가 일정 수준 상호 호혜적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뉴퍼 회장은 5일 한국을 방문해 삼성과 SK하이닉스, 산업통상자원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 관계자들을 면담할 예정이다. 7일에는 일본을 찾는다.
SIA는 미국 내 반도체 제조사, 칩 설계 회사, 공구·재료 회사 등을 대표한다. 삼성과 SK하이닉스 등 세계 주요 반도체기업 3분의 2를 회원사로 두고 있다. 뉴퍼 회장은 미 무역대표부(USTR) 아시아태평양 담당 부대표 등을 역임했고, 2015년부터 SIS 회장을 맡았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