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등 서방 동맹이 러시아의 군사 활동 축소 발표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내놨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격이 줄었다는 의미 있는 신호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군사 전문가들은 특히 러시아가 키이우와 체르니히우 지역만을 언급하며 군사 활동 축소를 발표한 점을 주목했다. 이들 지역은 이미 러시아가 고전하거나 패배한 지역이 많다는 것이다. 미 당국도 군사 활동 축소가 병력 재배치를 위한 눈속임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군사활동 축소 진지한 신호 없어”
조 바이든 대통령은 29일(현지시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키이우와 체르니히우에서 군사 활동을 축소하겠다고 언급한 것에 대해 “그들이 제안한 대로 실제 행동하는지 지켜볼 것”이라며 신중한 입장을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와 회담 후 백악관 공동 기자회견에서 러시아 발표에 대한 입장을 묻는 말에 “그들이 행동에 나서는 것을 볼 때까지 어떤 것도 예단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 같이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현재 협상이 진행 중”이라며 “그러나 강력한 제재를 이어갈 것이고, 우크라이나 군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며, 무슨 일이 진행되는지 주의 깊게 지켜볼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동을 순방 중인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도 “평화 추구에 관해 러시아 측으로부터 진정으로 진지한 신호를 보지 못했다”며 “러시아는 즉각 공격을 멈추고 병력을 철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블링컨 장관은 “러시아는 말하는 게 있고 행동하는 게 있는데, 우리는 후자 쪽에 더 무게를 둔다”며 “(군사 활동 축소와 관련) 러시아가 방향을 전환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군사 활동 축소가) 우크라이나 동부 및 남부에만 초점을 맞추는 공격 방향을 반영하는지 여부를 말할 수 없다”며 “(협상이) 효과적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 하는 어떤 것도 보지 못했다
그는 “러시아가 하고 있는 건 우크라이나와 그 국민에 대한 야만적 행동이며, 지금 이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계속되고 있다”며 “(러시아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침략을 끝내고, 발포를 중지하고, 군대를 철수하고, 대화에 참여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러 발표에 속아선 안 돼”
전문가들도 러시아 발표에 회의적인 분석을 내놨다. 로이터통신은 “러시아는 마리우폴, 하르키우, 헤르손 등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며 “일부 전문가들은 군사 활동 축소 지역이 대부분 러시아가 패배한 지역이라고 지적했다”고 보도했다.
마크 허틀링 전 유럽 주둔 미군 사령관은 “키이우 주변에서 군사 작전을 대폭 축소하겠다는 건 (우크라이나군에 의해) 쫓겨난 곳에서 방어로 전환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 당국자도 “키이우 주변에서 러시아군의 이동은 철수가 아니라 재배치라고 생각한다”며 “그들은 기어를 바꾸고 있는데, 이는 초기 공격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로이터통신에 말했다.
프랑스 전략연구재단 국방 분석가 프랑수아 하이즈부르도 “(군사활동 축소는) 이미 식량과 탄약이 떨어진 곳, 물류 지원이 안되는 곳의 군을 통합, 재편성하고 철수할 기회”라고 말했다.
미 전쟁연구소(ISW)도 “우크라이나군은 키이우 북서쪽 이르핀을 탈환했고, 동쪽 브로바리에 대한 러시아군 공격을 추가로 격퇴했다”며 “우크라이나 북동부에서 러시아군은 교착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 “러시아는 동부 우크라이나 공격에 집중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키이우를 포위하고 점령하려는 목표는 포기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존 커비 미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러시아가 키이우 근처에서 군사적 공격을 줄일 것이라는 주장이나, 병력을 철수할 것이라는 보고에 누구도 속아서는 안 된다”며 “러시아는 지난 한 달 간 우크라이나 정부를 전복하고 점령·합병하기 위해 여러 지역을 공격해 왔다”고 말했다.
커비 대변인은 최근 키이우 주변에서의 러시아군 이동에 대해 “우리는 소규모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것이 진정한 철수가 아니라 재배치이며,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역에 대한 주요 공격을 주시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그는 “러시아는 키이우를 점령하려는 목표에 실패했다”며 “우크라이나를 정복하려는 목적에는 실패했지만 여전히 국가에 막대한 만행을 가할 수 있다. 오늘도 공습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푸틴의 목표는 러시아의 즉각적인 목표를 조정하고 옮기려는 노력일 수 있다”고 말했다.
커비 대변인은 “그들이 어떤 추가 조치를 취하는지 판단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면서도 “아무리 생각해도 지난 한 달 동안 세계가 목격한 사실을 가릴 수 없다”고 말했다.
영국 킹스칼리지런던 전쟁 연구 로렌스 프리드먼 명예교수는 “단계적 축소는 퇴각의 완곡어법”이라며 “러시아는 목표를 현실적으로 조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후퇴는 항복이 아니고, 러시아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진지한 협상을 할 준비가 돼 있다는 의미도 아니다”고 경고했다.
“러시아 제재 계속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와 53분간 통화하고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 논의했다.
백악관은 성명을 통해 “러시아의 잔혹한 공격에 대한 대가를 계속 올리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안보 지원을 계속하겠다는 결의를 확인했다”며 “제재로 인한 안정적인 에너지 시장 지원의 중요성에 대해 논의했다”고 밝혔다.
영국 총리실도 “우크라이나에 가한 공포가 끝날 때까지 서방의 (제재) 결의를 완화할 수 없다는 데 동의했다”고 설명했다.
존슨 총리는 이날 고위 각료회의에서 “휴전만으로는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해제할 수 없다. 러시아가 방향을 완전히 바꾸도록 하기위해 추가 경제 조치와 군사적 지원으로 푸틴에 대한 압박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대변인이 전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