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미국의 대화 제의에 응하지 않고 미사일 도발만 강화하자 조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이 실패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제기됐다. 비핵화를 위한 미국의 소극적 조치가 북한에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 개발 시간만 벌어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왔다는 지적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9일(현지시간) 대북 전문가들을 인용해 “미국은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북한을 설득하는 캠페인에서 패배했음을 인정하고, 대신 위기 감소와 군비 통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보도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해 ‘조정된 실용적 접근’이라는 새 대북 정책 방향을 발표했다. 대북 접근법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언급되지 않았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후 북한의 도발에 대해서는 제재와 억지력 강화로 대응하면서도 “‘조건 없는 대화’의 문이 열려있다”며 외교적 관여에 나설 것을 반복해 촉구해 왔다.
그러나 북한은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전략 발표 이후 지난해 9월 이후에만 모두 30차례 미사일 도발을 감행했고, 그사이 기술 수준도 높였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 사이에선 미국이 적극적 관여에 나서지 않으면서 한반도 안보 불안만 커진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북한은 한·미 해상훈련, 한·미·일 대잠전 훈련 등을 겨냥해 최근 2주간 7차례 미사일 도발에 나섰다. 한·미는 이번에도 이를 강력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군사훈련 맞대응을 했다. FT는 이에 대해서 “한국, 미국, 일본에서 나오는 군사적 제스처와 강경 발언은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억제하기 위한 아이디어나 옵션이 바닥났다는 현실을 속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앙킷 판다 카네기국제평화재단 핵정책프로그램 선임연구원은 “비핵화에 대한 고집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웃음거리가 됐다. 북한은 (비핵화 싸움에서) 이미 이겼다”며 “이는 쓴 알약이지만, 언젠가는 삼켜야만 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북한에 핵무기가 있다는 현실을 인정할 때까지 기다릴수록 북한의 무기고는 더 확장·정교해지고, 향후 협상에서도 더 큰 비용을 치러야 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채드 오캐럴 코리아리스크그룹 대표는 “대북 정책을 담당하는 대부분의 미국 고위 관리들은 이제 비핵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개인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공개적으로 말할 수도 없고, 말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니 타운 미 스팀슨 센터 선임연구원도 동아시아에서 심화하는 군비경쟁과 미·중 간 긴장 고조 등을 언급하며 “한국을 포함한 모두가 무장을 강화하고 있을 때 북한이 비핵화를 고려할 것으로 생각하는 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비핵화 주도 프로세스의 창이 닫혔다”고 지적했다.
대북 전문가인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는 “미국이 비핵화 정책을 유지하는 한 북한은 대화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며 “북한이 핵무기에 대한 제한을 고려하도록 설득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에게 대가를 지급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핵 도발 우려의 목소리도 제기됐다. 마이크 멀린 전 합참의장은 이날 ABC방송에서 2017년 북한 핵실험 이후 다시 핵전쟁 가능성이 높아진 것 아니냐는 질문에 “심지어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현재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이미 역대 최고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어 “(협상의) 지렛대가 아닌 실질적으로 핵을 탑재한 미사일 (도발) 가능성이 5년 전과 비교해 한층 높아졌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멀린 전 의장은 “김정은이 현시점에서 경로를 바꿀 것 같지 않다. 북한의 핵 개발은 꾸준히 진행 중이며, 김정은이 핵 능력을 보유했을 가능성이 크다”며 “우리가 한층 위험한 국면에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략 소통 조정관은 “우리는 검증 가능하고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를 원한다. 우리는 전제 조건 없이 협상 테이블에 앉기를 원한다는 의사를 그들에게 전달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제안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 만큼 우리가 할 일은 해당 지역에 역량을 보유하고 있고, 필요할 때를 대비해 들어갈 준비가 돼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위협 상황이 발생한다면 한·미·일 3국은 우리의 안보를 방어할 수 있는 자산을 배치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