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 인근 도시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 증거가 속속 드러나면서 전 세계가 분노하고 있지만 중국 정부와 관영 매체는 “확인되지 않은 전쟁범죄”라며 러시아를 두둔하고 나섰다. 중국은 민간인 학살을 부인하는 러시아 편에 서서 “성급한 비난을 자제해야 한다”고 했다.
5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회의에서 우크라이나 민간인 희생자들의 처참한 모습이 담긴 90초 분량의 영상이 공개됐다. 키이우 북서쪽에 위치한 부차를 비롯해 이르핀, 디메르카, 마리우폴 등에서 어린이들을 포함한 민간인 희생자들의 시신이 그대로 상영됐다. 안보리 회의장은 잠시 술렁였다가 이내 숙연해졌다.
이 영상을 소개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화상 연설에서 “러시아군은 민간인의 팔다리를 자르고 목을 베었다”며 “그들은 오로지 재미로 아무나 죽이고 온 가족을 몰살했으며 시신을 불태우려 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러한 짓은 다에시(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 IS의 아랍어 약자)와 같은 테러리스트들이 하는 짓과 전혀 다르지 않다”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저질러진 가장 끔찍한 전쟁범죄”라고 강조했다. 안보리 이사국 대다수는 러시아의 민간인 학살을 강하게 규탄했다.
그러나 중국은 아니었다. 장쥔 유엔 주재 중국대사는 “부차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은 아주 끔찍하다”면서도 “사건의 전후 과정과 정확한 원인에 대한 검증부터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결론이 나기 전까지는 사실에 근거한 비판만 가능하다”며 “성급하게 비난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도 “미국과 유럽연합(EU)은 부차에서의 확인되지 않은 전쟁범죄가 공개된 뒤 러시아에 대한 추가 제재를 검토하고 있다”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위기가 끝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미국과 서방의 분명한 목표”라는 주장을 폈다. 이 매체는 또 사설을 통해 “비록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궁극적으로는 전쟁이 모든 비극의 주범이라는 것은 확실하다”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휴전을 하지 않는 한 인도주의적 비극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물타기하는 태도를 보였다.
러시아는 민간인 살해를 부인하고 있지만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점령지의 민간인을 상대로 저지른 끔찍한 집단학살과 성폭력 등의 증거는 계속 나오고 있다. 안보리 회의에 참석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부차에서 살해된 민간인들의 무시무시한 사진들을 잊을 수 없다”며 “실질적인 책임 추궁을 보장할 수 있는 독립 조사를 즉각 요구한다”고 밝혔다.
베이징=권지혜 특파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