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 중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현지 매체에 기고문을 내 “새로운 시대 중·아랍 운명공동체를 구축하자”고 말했다. 미국의 오랜 우방이었다가 지금은 관계가 냉랭해진 사우디는 2016년 1월 이후 6년 만에 국빈 방문한 시 주석을 공군 전투기로 에스코트하는 특별 의전으로 환대했다. 중국은 중동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타 역내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다.
8일 신화통신에 따르면 시 주석은 리야드 신문에 실은 기고문에서 2000여년 전 실크로드를 통한 중국과 아랍 문명의 교류를 언급한 뒤 “사우디 국빈 방문은 계승의 여행이자 개척의 여행”이라며 “중국과 사우디, 중국과 아랍 관계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했다. 시 주석은 이어 “아랍 세계는 개발도상국의 중요한 구성원이자 공정과 정의를 수호하는 힘”이라며 “아랍인들은 독립 자주를 숭상하고 외부 간섭에 반대하며 강권 횡포를 두려워하지 않는 국민”이라고 추켜세웠다.
또 “중국은 아랍의 주권 독립과 영토 보전을 지지하고 아랍 국가들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확고히 지지한다”면서 “100년 만에 찾아온 새로운 정세 속에서 중국은 아랍 국가들과의 우호 정신을 계승하고 새로운 시대를 향한 중·아랍 운명공동체 구축에 협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시 주석이 탄 전용기가 전날 사우디 영공에 진입하자 사우디 공군 전투기 4대가 에스코트 했다고 보도했다. 전용기가 수도 리야드 상공에 들어섰을 땐 의전 호위기 사우디 호크 6대가 전용기와 동반 비행을 했다. 리야드 공항에는 지역 수장인 파이살 빈 반다르 알 사우드 왕자와 외교장관인 파이살 빈 파르한 알 사우드 왕자를 비롯해 왕실 인사와 고위 당국자들이 영접을 나왔다. 리야드 도심 도로에는 중국 국기가 내걸렸다.
시 주석은 오는 9일까지 사우디에 머물며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회담할 예정이다. 또 제1회 중국·아랍 정상회의와 중국·걸프협력회의(GCC) 콘퍼런스에 참석한다. 외신들은 빈 살만 왕세자가 주최하는 성대한 환영 행사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시 주석의 사우디 방문에는 정치국 상무위원이자 최측근인 딩쉐샹 중앙판공청 주임, 왕이 중앙정치국 위원 겸 외교부장, 허리펑 정치국 위원 등이 동행했다.
아랍의 맹주인 사우디는 중동 유일의 주요 20개국(G20) 회원국이자 GCC 좌장 국가다. 지난 80년간 미국의 강력한 우방이었지만 조 바이든 미 대통령 취임 이후 관계가 멀어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에 사우디가 개입됐다며 사우디를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겠다고 공언했다. 이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 유가가 급등해 에너지 위기가 닥치자 지난 7월 사우디를 방문해 관계 정상화를 시도했지만 석유 증산 약속을 받지 못하고 돌아갔다. 사우디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대러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러시아와 밀착하고 있다.
시 주석의 사우디 방문은 바이든 대통령의 빈손 귀국 후 5개월 만이다. 양측은 시 주석의 역점 사업인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사우디가 탈석유·사업 다변화를 위해 추진 중인 ‘비전 2030 사업’을 연계해 여러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사우디가 수출하는 원유의 4분의 1을 중국이 사들이고 있다. 사우디 국영 SPA 통신은 시 주석 방문 기간 양국이 1100억 리얄(38조6000억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베이징=권지혜 특파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