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인들에게 정치는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정치에 관심을 가질수록, 적극적으로 참여할수록 삶은 불행해졌다. 가능하면 정치영역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살아야 행복할 수 있었다.
러시아 국민들의 삶의 방식은 여느 국가 일반적인 시민들의 생활 방식과는 한참 다르다. 21세기에 일어난 현상이 아니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191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러시안 라이프스타일’이다.
옛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에서 소련 해체 이후 잠시 동안의 서구식 민주주의 체제를 거쳐 푸틴 시대의 권위주의 정권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인들은 독특한 생활방식 속에 살아왔다. ‘공산주의든, 권위주의 독재든, 혼란만 가득했던 민주주의 체제든 집권세력과 현재 권력에 순종하기만 하면 별다른 고통과 고민 없이 내 삶은 살아갈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옛 소련 시절부터 남아있던 은퇴연금, 의료복지 등을 누리며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자신의 능력에 따라 택하고 거기에 맞는 교육을 받고 가족을 부양하고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레닌부터 스탈린,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고르바초프까지 소련 시절 공산당 서기장들은 동유럽의 민주화 요구를 잔인하게 진압하고 수많은 소수민족을 탄압하면서도 슬라브족 러시아인들을 위한 사회복지 혜택은 조금도 줄이지 않았다.
소련 해체 후 집권한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도 나라가 모라토리엄(국가파산)을 당했어도 ‘사회주의의 위대한 유산’인 복지제도는 그대로 유지했다. 물론 푸틴 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야당과 정치 라이벌은 비밀경찰을 동원해 독살 시도까지 서슴지 않으면서도 일반 시민을 위한 사회복지는 줄이지 않았다.
그 덕분에 러시아인들의 정치 무관심 증후군은 ‘상식’으로 굳어졌다. 공직사회가 온갖 비리에 얼룩지고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야합해 소수의 ‘억만장자·정치엘리트 복합체’가 러시아를 새로운 형태의 권위주의 독재국가로 만들어가도 평균적인 러시아 국민은 아예 눈을 감았다. 눈을 뜨고 부정부패를 없애겠다고 저항해봤자 가혹한 탄압에 삶만 망가지는 경우를 수도 없이 봐 왔기 때문이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는 15일 전쟁 종군 전문기자 사브리나 태버니스가 쓴 기획기사를 통해 “푸틴이 일으킨 우크라이나 전쟁이 ‘정치에 무관심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러시아인들의 오래된 삶의 교훈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고 보도했다.
태버니스 기자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표출하는 집회·언론·결사의 자유가 완벽하게 차단된 ‘러시아적 사회구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인들의 생활 방식을 정치 무관심과 지독한 이기주의의 일반화로 정형화시켰다”면서 “그러나 이런 러시안 라이프스타일은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산산조각이 날 위기에 처했다”고 분석했다.
NYT에 따르면 러시아인들은 옛 소련 체제의 유산인 무상복지·무상교육 시스템이 작동하는 한 그들을 통치하는 권력이 어떤 형태이든 상관없이 용인해 왔다. 특히 푸틴 체제에서는 2000년대 초반 서유럽에 대한 대규모 에너지 수출로 러시아가 엄청난 경제적 부를 얻게 되자 사회복지는 한층 더 강화됐고, 이 복지 시스템은 푸틴의 권위주의 독재 체제를 유지하고 강화시키는 ‘제1의 도구’가 됐다.
푸틴의 강압통치가 횡행하는데도 러시아 국민이 20년 가까이 선거를 통해 푸틴을 선택한 게 바로 그 증거다. 강압 통치의 희생양이 소수의 지식인 집단, 야당 정치 엘리트로만 국한됐을 뿐 일반 국민의 삶은 더 나아졌다고 여겨왔다는 것이다.
러시아인들의 정치적 수동성은 무력감에서 기인한다. 집권세력과 다른 목소리를 내봤자 돌아오는 것은 처벌과 강압이었을 뿐 기존의 정치구도는 변화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 같은 러시아 일반 대중에게 엄청난 가치관 혼동을 일으켰다. 같은 혈통, 지방사투리 정도로 여겨지는 언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을 향해 푸틴이 총부리를 겨누고, 엄청난 병력을 동원하면서 보통 러시아 시민들에게도 전쟁의 피해가 예측불허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징집된 10대 후반~20대 초반 아들이 갑자기 사망했다거나 우크라이나군의 포로가 돼 잡혀있다는 소식이 날아들고, 자신의 친척 이웃이 러시아군에 의해 살해되는 비극을 겪는다.
태버니스 기자는 다양한 러시아 취재원들을 인용해 “러시아 정부의 여론 통제가 더욱 삼엄해졌지만 보통시민들의 가정과 직장, 학교 내에선 극도의 혼란과 불안이 퍼져나가고 있다”면서 “마치 물밑의 소용돌이처럼 푸틴 정권에 대한 불신이 들끓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불신의 가장 큰 원인은 푸틴이 내세운 전쟁의 이유에 대해 상식적으로는 공감할 수 없다는 심리”라며 “돈바스 지역을 보호하려는 목적이라면서 조국의 군대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침공하고 민간인을 학살하는 행태를 그냥 두고 볼 수 없게 됐다”고 설명했다.
NYT는 “러시아인들은 지금 전쟁에 소모되는 엄청난 경제적 비용과 징집으로 전장으로 끌려가는 10만 이상의 젊은이들, 한 다리 건너면 친척이나 친구인 우크라이나인들의 고난을 마주하고 있다”면서 “그들에게 이제 ‘정치에 무관심할수록 더 행복해진다’는 러시아식 생활방식의 환상은 깨져가고 있다”고 전했다.
신창호 선임기자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