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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권 문제로 발칵 뒤집힌 미국…중간선거 핵으로 등극



3일(현지시간) 찾아간 미국 워싱턴DC 연방 대법원 주변은 시끌벅적했다. 대법원 주변에는 차량과 인파를 통제하기 위한 바리케이드가 설치됐다. 주요 길목마다 경찰도 배치됐다. 낙태권을 옹호하거나 반대하는 단체와 시민 수백 명이 몰려와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다.

낙태 옹호론자들은 오전부터 대법원 입구 계단 주변을 에워쌌다. 대부분이 ‘낙태가 생명을 살린다’ ‘낙태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 등 문구를 적은 팻말을 들었고, 확성기를 들고 대법원을 비난하는 시민들도 있었다.“소름 끼치고 결정” “여성의 권리를 짓밟는 법원”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여성의 낙태권이 순식간에 미국 정치 한 가운데로 등장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한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뒤집는 의견을 다수 의견으로 채택한 초안이 공개된 이후 파장이 점점 확산하고 있다. 낙태권 문제는 진보와 보수 간 대결 구도를 형성하며 중간 선거 핵심 의제로 떠오를 조짐도 보인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여성 선택권은 근본적 권리”라며 11월 중간선거에서 이를 옹호하는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성명에서 “이 판결은 50년 가까이 이 땅의 법이었다. 법의 기본적 공평함과 안정성 측면에서 뒤집혀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대통령이 대법원판결이 나오기도 전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비판적 발언을 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만약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는다면 모든 선출직 공직자는 여성 권리를 지켜야만 하고, 유권자들은 11월 선거에서 이를 옹호하는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낙태 문제를 선거 핵심 쟁점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낙태권을 성문화하기 위해 우리는 상·하원에 더 많은 의원이 필요하다. 나는 이 입법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부부도 “수백만 명의 미국인이 헌법에 따른 본질적 자유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두려움 속에 잠에서 깨어났다”며 “11월 8일(중간선거) 낙태권을 성문화하려는 사람들에게 투표하라”는 성명을 내며 논쟁에 동참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은 1973년 연방대법원이 임신 약 24주 뒤에는 태아가 자궁 밖에서 생존할 수 있다고 보고 그전에는 낙태를 허용한 것이다. 미국에서 낙태권을 보장하는 핵심 개념으로 받아들여 져 왔다.


폴리티코는 전날 대법원이 이를 뒤집는 내용의 초안을 작성했다고 보도했다. 해당 초안을 작성한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은 “시작부터 터무니없이 잘못됐다. 우리는 헌법에 귀를 기울이고, 낙태 문제를 국민이 선출한 대표에게 돌려줘야 할 때”라고 적었다. 얼리토 대법관은 “헌법은 낙태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고, 그러한 권리는 헌법 조항에 의해 보호되지 않는다”는 표현도 했다. 주별로 선출된 공직자가 낙태권 범위를 정하는 게 맞는다는 취지다. 낙태권이 헌법적 권리라는 기존 원칙 역시 깨지게 된다.

대법원은 이날 “지난 2월 대법관들 사이에 회람된 의견 초안이 맞다”면서도 “최종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초기 버전”이라고 밝혔다. 대법원은 6월 말~7월 초순에 실제 결정을 내놓을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낙태권 옹호 단체인 미 구트마허연구소는 대법원이 기존 판례를 무효화하면 미국 50개 주 중 26개 주가 낙태를 사실상 금지할 것이라고 집계했다. 대부분 낙태에 반대하는 공화당이 우위에 있는 곳들이다.

미주리주 에릭 슈미트 법무장관은 “대법원 판단이 내려지면 미주리주는 태어나지 않은 아기를 보호할 의견을 즉시 발표할 준비가 돼 있다”고 환영했다. 마이크 파슨 미주리 주지사는 2019년 임신 8주 이후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대법원이 판결을 뒤집으면 미주리주에서는 이 법이 곧바로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민주당은 헌법적 권리가 무너지게 됐다며 유권자들의 행동을 호소했다. 민주당 소속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와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공동 성명을 내고 “대법원은 여성만이 아니라 모든 미국인에게 가장 큰 권리 제약을 가하려 한다”며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려는 공화당 임명 판사의 표결은 혐오스러운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현대 역사에서 최악의, 가장 해로운 결정”이라며 “선례와 대법원의 평판을 모두 더럽혔다”고 지적했다.

슈머 원내대표는 “상원이 낙태권을 법적으로 성문화하는 법안에 대해 투표를 실시하겠다”며 “이 법안에 대한 투표는 이제 상징적인 일이 아니라 시급하고 현실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대법원 판례 대신 연방법으로 낙태권과 범위를 명확히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낙태권 보호에 긍정적인 여론이 높은 만큼 이를 중간 선거의 핵심 쟁점으로 끌고 가겠다는 의도도 담겨있다.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심판 성격을 낙태권을 둘러싼 민주당과 공화당 대결 구도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CNN이 지난 1월 벌인 여론조사에서 미국인 69%는 현재의 낙태권을 지지했다. 퓨리서치센터가 지난해 벌인 여론조사에서도 미국인 59%는 낙태 합법화를 옹호했다.



반면 공화당은 이번 사안을 초유의 대법원 의견서 초안 유출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방어에 나섰다. 공화당 미치 매코널 상원의원은 “(초안 유출은) 연방 판사를 위협하려는 급진좌파 캠페인”이라며 “대법원 독립성에 대한 공격”이라고 비판했다.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도 “합리적인 주장 대신 대중의 압력을 통해 법원을 협박하려는 노골적인 시도”라고 지적했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도 초안 유출을 ‘법원 기밀에 대한 배신’이라며 “경위 조사를 시작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혔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