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현지시간) 개막한 제77회 유엔 총회는 러시아에 대한 국제사회 성토장이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동맹 정상들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신제국주의’ ‘신식민주의’라 비난하며 전쟁 종식을 촉구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안보 위협과 에너지 위기에 직면한 유럽 국가 정상들의 연설은 러시아에 대한 규탄에 집중됐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러시아 전쟁을 ‘제국주의 시대로의 회귀’라고 부르며 강력히 비판했다. 그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침략으로 우리의 집단안보를 무너뜨렸다. 유엔 헌장과 국가의 주권 평등 원칙을 고의로 위반한 것”이라며 “그들은 역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러시아 전쟁에) 침묵하는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는 신제국주의에 공모하는 것”이라며 유엔 회원국들에 공동 행동을 촉구했다.
울라프 숄츠 독일 총리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제국주의’ ‘신식민주의’라 비판하며 “유럽과 세계 평화 질서의 재앙”이라고 말했다. 숄츠 총리는 “러시아를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전쟁을 끝내고 싶다면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며 “푸틴은 자신이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경우에만 전쟁과 제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무기와 재정적 지원으로 전력을 다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러시아에 강력한 경제 제재를 가하는 것이 국제 평화와 안보를 유지하기 위한 약속을 이행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올해 처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한 핀란드의 사울리 니니스퇴 대통령도 “국제 사회는 잔인한 러시아의 침략을 용인할 수 없다”며 유엔 회원국들에 더 많은 조처를 하도록 요청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도 러시아 비판에 동참했다. 그는 “유엔은 강대국의 이익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며 “법치주의에 입각한 국제질서를 달성하기 위해 유엔을 개혁하고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장외에서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점령지를 합병하기 위해 추진 중인 주민투표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러시아가 사기(sham) 주민투표를 추진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그 어떤 영토에 대한 러시아의 주장도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크롱 대통령도 기자들과 만나 “(주민투표는) 법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전쟁의 고통을 겪고 있는 지역에서 투표한다는 발상 자체가 냉소주의의 극치”라고 비판했다.
다만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대러 제재를 비판하며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했다. 그는 “일방적인 제재는 분쟁을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며 “대화와 협상을 통해서만 해결책에 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프리카연합(AU) 의장인 마키 살 세네갈 대통령도 “아프리카 대륙 지도자들은 한쪽을 선택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며 “아프리카는 신냉전의 온상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국 문제도 거론됐다.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양자 회담을 하고 중국의 대만 도발을 규탄했다. 영국 총리실 대변인은 “두 정상은 중국이 제기한 전략적 위협을 해결하기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며 “권위주의 정권의 경제 및 안보 위협을 억제하기 위해 주요 7개국(G7)와 같은 국제기구 등을 통해 민주주의 국가가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동의했다”고 밝혔다.
대만 수교국인 데이비드 카부아 마셜 제도 대통령은 유엔이 대만의 참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우리 섬 주변과 대만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지금이 의미 있는 참여의 기회”라고 말했다.
이날 유엔 총회에선 글로벌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 기후위기와 식량안보 등 국제사회를 덮친 산적한 위기에 대한 우려도 제기됐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전 세계 사람들이 구호와 희망을 외치고 있지만, 기후, 분쟁, 지속 가능한 개발 목표 등 주요 도전 과제에 대한 국제적 행동은 기능 장애로 마비되고, 지정학적 긴장에 인질로 잡혀 있다”고 경고했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분열은 깊어지고, 불평등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생활비 위기가 닥쳐오고 있고, 불만의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다. 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고통 받고 있다. 유엔이 추구하는 이상이 위험에 처해 있다”며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글로벌 비료 부족이 글로벌 식량 부족으로 번질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