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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색인종, 백인 대체한다’…백인 우월주의 극단범죄의 뿌리


“이민자와 소수인종들이 백인을 대체하고 있다.” 프랑스의 인종주의 작가 르노 카뮈는 2011년 자신의 저서 ‘대전환’(The Great Replacement)에서 이렇게 주창했다. 이후 ‘대전환 이론’은 극단적 백인우월주의 신봉자들의 사상적 토대가 됐다. 뉴욕주 북부 버펄로 슈퍼마켓에서 총기를 난사해 13명의 사상자를 낸 페이튼 젠드런도 이를 언급했다.

백인우월주의자들 사이에서 대전환 이론이 급속히 확산하며 테러 위기를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 발생한 극단주의 폭력 사태 현장 대부분에서 해당 주장의 흔적이 발견됐다. 인종혐오 이론은 소셜미디어(SNS)를 타고 광범위하게 퍼졌고, 정치인과 극우 언론이 이를 언급하며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분석이다.

15일(현지시간) 미국 반명예훼손연맹(ADL)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극단주의자에 의해 살해된 443명 중 333명(75%)이 극우 성향 극단주의자에 의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 중 73%는 백인우월주의자 범죄였다. 지난해에는 19건의 극단주의 범죄로 29명이 사망했는데 이 중 26명이 백인우월주의자에 의한 범죄였다. 2020년 백인우월주의자에 의한 살인 범죄는 전체 극단주의 범죄 15건 중 14건을 차지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대전환 이론이 백인 민족주의자들을 국제적 무장 세력으로 바꿔놓았다”며 “(백인인 멸절할 것이라는) 종말론적 비전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추종자를 축적했고, 인종차별주의 사상의 온라인 확산을 가속했다”고 분석했다. 대전환 이론은 극소수의 권력 집단이 자녀를 많이 낳는 아프리카와 중동 이민자들을 끌어들여 백인을 몰아낸다는 일종의 음모론이다.

2019년 뉴질랜드 크라이스처치의 이슬람 사원 총기 난사 사건 범임 브렌턴 태런트는 범행 전 인터넷에 올린 글에서 “상대적으로 출산율이 높은 이민자들이 백인을 대체할 것”이라며 대전환 이론을 언급했다. 미국 텍사스 엘패소의 월마트 매장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 범인 패트릭 크루시어스도 같은 주장을 폈다.

젠드런을 부추긴 것 역시 대전환 이론이다. 그는 범행 전 올린 성명서에서 테러 이유에 대해 “서방이 직면한 실제 문제에 대한 인식을 동료 백인에게 전파하고, 서방을 구할 전쟁을 시작하게 될 추가 공격을 장려하는 것”이라고 썼다. 서방이 직면한 실제 문제는 바로 유색인종이 백인을 대체할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증오와 극단주의에 대항하는 글로벌 프로젝트’(GPAHE) 설립자 하이디 바이리크는 “대전환 이론은 현재 백인 우월주의자 사이에서 가장 폭력적인 이념”이라고 말했다.

WP는 “이 이론은 일부 극우 백인 극단주의자에게만 국한됐던 것이었는데 최근 몇 년 동안 보수 인사들 사이에서 화제로 떠올랐다”고 지적했다. 음모론이 주류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미국 폭스뉴스 앵커 턱커 칼슨은 자신이 진행한 프로그램에서 2016년 이후 400여 차례 이상 해당 이론을 차용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제3세계 사람들이 현재의 유권자를 대체하고, 정치적 권력을 희석하기 위해 미국에 이민을 온다”고 말하는 식이다. 칼슨은 조 바이든 대통령의 이민 정책을 비판하며 “국가의 인종 혼합을 바꾸고, 제3세계에서 새로 도착한 미국인 비율을 극적으로 늘리기 위해 이민을 장려하고 있다”는 말도 했다.

백인우월주의 음모론은 이제 온라인 공간을 넘어 오프라인에서까지 광범위하게 확산하고 있다. ADL은 전단, 스티커, 현수막, 포스터 등의 도구를 활용해 백인우월주의 사상을 선전한 사례를 추적하고 있는데, 최근 2년간 확인된 건수만 9940건(2020년 5125건, 2021년 4815건)에 달한다. ADL은 지난해 펜실베이니아, 버지니아, 텍사스, 매사추세츠, 메릴랜드, 뉴욕, 워싱턴DC 등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선전 활동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위스콘신주에선 인종차별 항의 시위대 두 명을 총으로 쏴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된 백인 청년 카일 리튼하우스에 대해 “그가 옳았다”는 선전 문구를 퍼트리는 식이다.

텍사스주에 기반을 둔 백인 우월주의 단체 ‘패트리엇 프런트’는 대학 캠퍼스 게시판 232개 중 190개에 백인 우월주의 선전물을 올리기도 했다. 뉴저지 유럽 유산 협회(NJEHA)는 “백인이라는 이유로 당신을 미워한다” “제3세계의 미국 침공을 멈춰라” 등의 게시물을 배포했다.

밀란 오바이디 오슬로대 교수는 “대전환 이론은 이제 인터넷 주변부나 극단적인 집단에서만 찾을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주류가 되고 있다”며 “유럽과 미국의 기성 정치인들이 비슷한 생각을 내세우는 걸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오는 지역 사회를 애도하기 위해 해당 지역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는 이날 “인종 범죄는 매우 혐오스럽다. 백인우월주의를 포함한 어떤 국내 테러행위도 미국 가치에 반하는 일”이라며 “혐오에 기반을 둔 국내에서의 테러 행위를 종식하기 위해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성명도 발표했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도 이날 성명을 내고 “사법당국이 조사를 진행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증오의 풍토병이 퍼져나가고 있다는 것”이라며 “인종 때문에 시작된 증오범죄나, 극단주의 폭력행위는 우리 모두에게 백해무익한 것”이라고 밝혔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