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바이든 정부가 반도체·전기차 등의 첨단산업 기반을 자국 중심으로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한국 투자를 고려하던 대만 반도체 기업의 약 7조원 규모 투자가 미국에 낙점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이는 지나 러몬도(51) 미국 상무장관의 전화 한 통에서 비롯됐다.
러먼도 미 상무장관은 지난 6일(현지시간) 미 유력 경제매체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6월 신규 공장 투자처를 찾던 대만 기업 글로벌웨이퍼스의 도리스 수 최고경영자(CEO)와 1시간 동안 통화해 대미 투자 결정을 받아냈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미국의 첨단 산업 수호를 위해 자신이 한 일을 언급하면서다.
글로벌웨이퍼스는 세계 3위 실리콘 웨이퍼(반도체 집적회로의 핵심 재료) 생산업체다. 이 업체는 지난 2월 독일 투자가 무산되자 유력 대체지로 한국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공장 건설비가 싸다는 등의 유리한 조건 때문이었다.
러몬도 장관은 직접 글로벌웨이퍼스의 수 CEO와 1시간가량 직접 통화하면서 투자를 설득했다. 수 CEO가 “한국에선 공장 건설 비용이 미국의 3분의 1에 불과하다”고 말하자, 러먼도 장관은 “거기에 맞춰주겠다”고 즉석에서 제안했다. 이윽고 2주 뒤 글로벌웨이퍼스는 텍사스주에 50억 달러(약 6조9195억원)를 들여 일자리 1500개를 창출하는 신규 공장 건설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러먼도 장관은 WSJ에 “미국이 핵심 광물, 전기차 배터리, 반도체, 인공지능(AI) 등 특정 기술 분야를 지배할 필요가 있다”며 “중국과 경쟁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미국에서의 투자”라고 말했다.
미국 상무장관이 7조원 투자를 위해 발 벗고 나서는 동안 한국은 이 업체와 접촉을 해놓고도 신기술 이전 효과가 없고 보조금 요구가 과도하다는 이유로 미국보다 더 적극적인 유치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미래 첨단산업 영역에서 생존을 위한 각축이 벌어질 때 동맹 관계보다도 냉엄한 국제 질서가 우선된다는 점을 보여준 단적인 사례였다.
미국의 ‘한국산 전기차 차별’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미 의회를 통과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때문이다. 이는 북미 지역에서 생산하지 않은 전기차에 대해 보조금 지급을 배제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러몬도 장관은 WSJ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의 전직 국가안보 고위 관료들과 접촉해 52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지원법에 대한 의회의 지지를 뒷받침했다는 사실도 언급했다.
그는 경호팀원에게서 H R 맥매스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팟캐스트에 나와 자신을 칭찬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맥매스터를 포함한 4명의 트럼프 전 행정부 관리들을 초청해 반도체법이 미국의 국가 안보를 위해 초당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4개월 뒤 반도체법은 공화당 상원의원 17명의 지지를 바탕으로 상원을 통과했다.
WSJ는 러몬도 장관이 진두지휘하는 상무부가 중국·러시아에 대항하려는 바이든 정부 ‘운전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과거에는 미 무역대표부(USTR)가 무역협정 문제를 주로 책임져왔는데, 이제는 반도체 투자부터 공급망 협력 이슈 등에 있어 상무부가 선두에 나서고 있다는 취지였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