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2일(현지시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안드레이 니키틴 노브고로드주 지사를 만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유럽에 판매하는 천연가스 대금을 자국 루블화로 결제받는 방안을 제도화했다. 유럽 국가들은 이 요구가 계약 위반이자 협박이라며 반발했다.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러시아 크렘린궁은 푸틴 대통령이 31일(현지시간) 이른바 ‘비우호국’ 구매자들이 이달 1일부터 러시아 가스 구매 대금을 자국 통화인 루블로 결제하도록 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항공산업 발전을 위한 회의에서 이같이 전하면서 “러시아에 비우호적인 서방 국가들은 러시아 은행에 가스 대금 결제를 위한 계좌를 개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비우호국 출신 구매자들이 새로운 결제 조건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현 가스공급 계약은 중단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서방 국가의 제재 시행에 맞서 러시아가 지정한 비우호국에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 영국, 27개 유럽연합(EU) 회원국 등 48개국이 포함된다.
루블화 결제 조건은 러시아 국영가스기업 가스프롬이 공급하는 파이프라인천연가스(PNG)에만 적용된다. 액화천연가스(LNG) 거래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유럽은 이같은 조치에 즉각 반발했다. 러시아 가스에 대한 의존도가 55%에 달하는 독일의 올라프 숄츠 총리는 “앞으로도 유로화나 달러화로 계속 결제하겠다”고 말했다. 로베르트 하벡 독일 부총리 겸 경제장관은 이날 프랑스 재무장관과 공동 기자회견에서 “유럽 국가들에 러시아 가스 대금을 루블화로 결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계약 위반으로, 이런 계책은 협박”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계약은 존중돼야 한다”며 “우리는 푸틴 대통령에 의해 협박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를 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가스 수입의 40%를 러시아에 의존한 이탈리아의 마리오 드라기 총리도 “계약을 위반하지 않고는 지불 통화를 바꾸기 어렵다”며 루블화 지급 요구에 선을 그었다. 그는 가스공급 중단 위협에 대해선 “유럽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달러·유로화를 루블로 전환하는 것은 러시아의 내부 문제”라고 덧붙였다.
인테르팍스 통신이 공개한 대통령령 전문에 따르면 외국 구매자는 가스 대금을 반드시 루블화로 송금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먼저 구매자가 전권 은행인 가스프롬방크에 개설한 ‘특별 외화 계좌’로 외환을 송금하고 가스프롬방크가 이를 모스크바 외환시장에서 루블화로 환전한 뒤 구매자의 ‘특별 루블화 계좌’로 입금해 러시아 공급자의 루블화 계좌로 송금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옥스퍼드 에너지연구소의 잭 샤플리스 박사는 푸틴 대통령의 조치에 대해 “가스프롬방크를 주요 가스 대금 결제 기관으로 지정함으로써 향후 이 은행에 부과될 서방의 제재에 대한 추가적인 방어막을 마련했다”고 분석했다. 코넬 대학의 에스와르 프라사드 이코노미스트는 뉴욕타임스(NYT)에 “푸틴은 제멋대로 계약의 조건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자국 가스에 의존하는 국가들도 입맛에 맞게 행동하도록 압박하기로 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